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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드림 류현진, 그에게 배우는 ‘성공 법칙’[광화문에서/이헌재]

입력 | 2020-01-16 03:00:00


이헌재 스포츠부 차장

“메이저리그 클럽하우스를 가 봤는데요. 크기가 운동장만 하고요. 안에 식당도 있고요. 호텔처럼 최고급 음식이 나오고요. 아니, 월풀까지 있었다니까요.” 8년 전 KBO리그 한화에서 뛰던 류현진(33·토론토)과 했던 인터뷰를 뒤져 보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당시 그는 2009년 제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 참가하면서 밟아 본 메이저리그 구장들을 눈을 반짝이며 묘사했다. 그저 선망의 대상인 줄만 알았던 그 무대에서 류현진은 ‘아메리칸 드림’을 이뤘다. LA 다저스에서 성공적인 7시즌을 치른 뒤 지난해 말 토론토와 4년 8000만 달러(약 927억 원)의 대형 계약을 했다. 지난해엔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메이저리그 전체 평균자책점 1위(2.32)를 차지했고, 올스타전 선발 투수로도 나섰다. ‘부’와 ‘명예’를 다 가진 슈퍼스타가 된 것이다.

류현진의 성공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토론토 입단 기자회견 등에서 그는 특유의 담담한 어투로 새 팀과 새 시즌에 대한 각오를 밝혔다. 그의 말을 듣다가 8년 전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그를 관통하고 있는 ‘성공 법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피드는 저랑 안 맞는 것 같아요.” 토론토 입단식에서 그가 무심한 듯 던진 말에 좌중엔 폭소가 터졌다. 메이저리그에서 그는 강속구 투수가 아니다. 지난해 그의 속구 평균 구속은 시속 146km였다. 최고 구속은 150km대 초반이다. 작년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속구 평균은 150km였다. 160km는 물론이고 170km에 육박하는 빠른 공을 던지는 선수들도 있다.

그런데 자기 공이 느리다고 인정하는 선수는 많지 않다. 많은 투수들이 스피드를 곧 자존심이라고 생각한다. 요즘도 적지 않은 투수들이 공을 던진 뒤 전광판을 쳐다본다. 구속이 얼마나 나왔는지 궁금한 것이다. KBO리그에서 뛸 당시 강속구 투수였던 류현진은 스피드에 대한 집착을 버렸다. 지난해 한국 투수들의 직구 평균 구속은 시속 142km였다. 류현진은 여전히 한국에서는 강속구 투수인 셈이다. 하지만 새로운 환경에서 그는 스스로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걸 농담으로 승화시키기까지 하는 건 류현진 정도 되어야 할 수 있다. 8년 전에도 그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 선수를 상대해 보니 실투 하나 나오면 공이 없어지겠더라고요. 스피드 대신 제구로 승부해야죠.”

자신을 잘 알고 있으니 해답도 명확하다. “많은 것을 바꾸기보다 원래 가지고 있는 구종을 가지고 조금 더 정교하게 던져야 할 것 같다.” 기자회견에서 말했듯 그는 욕심을 부리기보다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에 더 집중한다.

8년 전에도 그는 “불리한 볼카운트에서도 모든 구질로 스트라이크를 잡을 자신이 있다”고 했다. 원래 수준급이었던 4가지 구종(직구, 커브, 체인지업, 슬라이더)이 메이저리그에서는 한층 업그레이드됐다. 직구는 포심 패스트볼과 투심 패스트볼로 분화했고, 슬라이더는 더 빠른 슬라이더의 일종인 컷 패스트볼(커터)로 진화했다. 같은 변화구 안에서도 속도에 변화를 줬다. 한때 어리게만 보였던 류현진이 이제는 많은 이들에게 삶의 지혜를 주고 있다. 해마다 발전하는 그에게 올해도 한 수 배워야겠다는 생각이다.
 
이헌재 스포츠부 차장 u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