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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에서 살아남으려면[오늘과 내일/장택동]

입력 | 2020-01-17 03:00:00

미국-이란 충돌 전장 된 이라크
自强과 외교, 국제사회의 생존법




장택동 국제부장

“이라크는 5000마일 거리에 있는 친구(미국)와 5000년 동안 이웃으로 지낸 국가(이란) 사이에 있습니다. 우리가 지정학적 위치를 바꿀 수도, 역사를 바꿀 수도 없습니다. 이게 이라크가 처한 현실입니다.”

아딜 압둘마흐디 이라크 총리가 1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토로한 내용이다. 미국이 이라크 내 친이란 민병대를 공습하자 이라크 내 친이란 시위대가 이에 항의하기 위해 바그다드의 주이라크 미국대사관을 습격해 혼란이 가중되던 시점이었다. 뉴욕타임스가 전한 압둘마흐디 총리의 발언에는 강대국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라크의 답답한 처지가 담겨 있다.

최근 전 세계를 긴장시켰던 미국-이란 간의 충돌이 벌어진 곳은 미국이나 이란이 아닌 이라크였다. 이번 갈등의 시발점이 된 시아파 민병대의 공격으로 미국 민간인이 사망한 곳도, 미군이 가셈 솔레이마니 이란 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을 제거한 곳도,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이란이 미사일을 쏟아부은 곳도 모두 이라크 영토였다.

이유는 누구나 알고 있다. 이라크가 힘이 없기 때문이다. 이란이나 미국 영토 안에서 일이 벌어지면 자칫 전면전으로 번질 각오를 해야 하므로 양국 모두 애꿎은 이라크를 선택한 것이다.

이라크 주민들이 ‘주권 침해’라고 항의하고 이라크 의회가 미군 철수 결의안을 채택했지만 미국은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오히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이라크가 미군의 철수를 요구한다면 “이전까지 보지 못한 수준의 제재를 가할 것”이라고 엄포를 놨다.

이라크 인구의 대부분이 무슬림이고 시아파가 수니파보다 2배가량 많지만 이라크 국민들이 ‘시아파 종주국’ 이란을 무조건 지지하는 것도 아니다. 지난해 10월부터 거리로 쏟아져 나온 이라크 시위대는 “이란은 물러가라”고 외치며 이란영사관 2곳을 습격했다. 하지만 이란 역시 이라크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약소국이 강대국 간 대리전의 싸움터가 되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시리아 내전은 미국-터키-사우디아라비아 대 러시아-이란 간의 대리전 성격이 강하다. 리비아 내전도 터키-카타르와 사우디-이집트-아랍에미리트(UAE)가 대결하는 형국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라크는 24년간 사담 후세인의 철권통치 아래 이란, 미국과 전쟁을 벌이면서 피폐해졌다. 2003년 후세인이 몰락한 뒤에는 알카에다, 이슬람국가(IS), 친이란 민병대 등 다양한 무장세력이 등장했고 주변 강대국의 세력 다툼 속에서 이라크 사회는 더욱 어지러워졌다.

하지만 이라크전 이후에도 17년간 이어지고 있는 혼란의 원인을 외부의 탓으로만 돌리면 해법을 찾기는 어렵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이라크는 원유 매장량 세계 5위, 원유 생산량 세계 6위의 산유국이다. 한반도 2배 정도 크기의 국토에 약 4000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 재건을 위한 자원은 갖추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를 활용할 리더십이 없다. 미국 포린어페어스는 이라크 반정부 시위의 원인에 대해 “이라크 젊은이들의 인내가 임계점을 넘어섰다. 이들은 엄청난 석유 판매 수입이 정치, 경제 지도층의 주머니로 들어가고 교육, 일자리 창출, 사회기반시설에 투자가 이뤄지지 않는 것을 목격해 왔다”고 분석했다.

국제사회에서는 법보다 힘의 논리가 더 강하게 작동한다는 점은 여전히 유효한 것 같다. 앤드루 와이너 세이브더칠드런 정책연구소장은 영국 가디언 기고에서 “현실주의자들은 ‘정글의 법칙’이 국제사회를 지배하는 것으로 본다”고 썼다. 정글 같은 국제사회에서의 생존법은 스스로를 지킬 정치·경제·군사적 역량을 갖추고, 동맹과의 유대를 강화하는 것이 아닐까.

장택동 국제부장 will7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