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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디오크러시[이승재의 무비홀릭]

입력 | 2020-01-17 03:00:00


영화 ‘이디오크러시’의 한 장면.

좋은 영화란 뭘까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25단어 이내로 설명되는 이야기’를 좋은 영화의 조건으로 꼽았어요. 이렇게 한마디만 들어도 뇌리에 팍팍 꽂히는 쉽고 간결한 내용의 영화를 유식한 말로 ‘하이콘셉트(high concept) 무비’라고 해요. ‘공룡의 유전자를 복제해 복원한다면?’이란 질문을 던지는 ‘쥬라기 공원’이나 ‘조폭들이 학생이 된다면?’이란 얼토당토않은 궁금증을 담은 ‘두사부일체’, ‘말(馬)에만 올라타면 흥분하는 여성’이라는 형이상학적인 담론을 담은 ‘애마부인’이 하이콘셉트 무비의 대표 사례이지요.

얼마 전 기절초풍할 만큼 창의적인 하이콘셉트 무비 하나를 발견하였어요. ‘이디오크러시(Idiocracy)’라는 개봉도 안 된 미국 영화인데, ‘바보(idiot)’에다 ‘민주주의(democracy)’를 합친, 제목부터 B급인 이 코미디물은 진짜 재미난 질문을 던지며 시작해요. ‘인류가 지금 상태로 진화한다면?’이란 질문 말이에요.

2505년의 인류는 어떤 모습일까요? 놀랍게도 인류는 모두 바보 천치로 진화(?)해요. 똑똑한 사람들은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으려 죽도록 일만 하다 보니 아이를 낳을 시간이 없어 지능 유전자가 멸종하는 반면, 멍청한 인간들은 할 일도 없고 생각도 없어 애만 ‘주구장창’ 낳아 결국 인류는 멍청이 천국으로 바뀐다는 것이지요.

모두가 바보인 이 영화 속 미래 사회는 생각만 해도 웃기는 모습이에요. 극심한 경제 침체는 기본. 하도 머리들이 나쁘다 보니 전 국민의 지능지수(IQ)를 측정해 1등인 사람이 자동으로 대통령이 되는데, 새롭게 대통령에 뽑힌 자는 프로레슬링 챔피언에 올라 인기 ‘톱’을 찍은 포르노 스타 출신이에요. 사람들은 잡종 사투리는 물론 말끝마다 ‘F’가 붙는 비속어가 섞인 말을 ‘표준어’로 구사하는데, 대화 중 쌍욕을 섞지 않으면 “건방지다”며 주먹세례를 받지요. 종합병원 1층 로비에는 슬롯머신 수십 대가 운영되어 환자들의 다친 마음을 치유해주고, 아카데미상 8개 부문을 휩쓴 ‘엉덩이’란 제목의 영화는 90분 동안 뚱뚱한 남자의 살찐 엉덩이만 보여주어요.

놀랍게도 이런 포복절도할 미래 세상에, 그간 수백 년을 동면기계 속에 잠들어 있던 조 바우어란 평범한 남자가 깨어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영화는 담아내는데요. ‘미등록 인간’으로 체포된 조 바우어는 강제로 IQ 테스트를 받게 되는데, 맨 마지막에 출제되는 다음과 같은 최고난도 문제와 직면하지요. “당신은 지금 2갤런의 물이 든 물통과 5갤런의 물이 든 물통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몇 개의 물통을 가지고 있을까요?” 조 바우어는 IQ 테스트 사상 처음으로 ‘2개’라는 정답을 맞힘으로써 IQ 1등이 되어 신임 대통령이 되어요.

제목만큼 ‘병맛’인 내용 같지만, 알고 보면 이 영화엔 서슬 퍼런 통찰력이 도사리고 있어요. 미래엔 수십 년째 흉작이라 식량 고갈의 위기에 놓이는데요. 이유는 ‘브란도’란 거대 이온음료 기업이 미국을 지배해버리기 때문이에요. 브란도사(社)는 세금이 부족해 자금난에 빠진 미국식품의약국(FDA)을 인수해 버림으로써 세상의 모든 물(水)을 없애버리고 자신들의 이온음료로 대체해버리죠. 갓난아기가 젖병에 든 브란도를 우유 대신 쭉쭉 빨아먹는 건 둘째 치고, 농업용수까지 염도가 높은 브란도를 사용하니 흉년이 들 수밖에요. 바로 거대 기업이 정부를 대체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섬뜩한 미래에 대한 풍자이지요.

하긴, 요즘처럼 천박한 세상이 이어진다면 이런 난감한 미래가 도래하지 말란 보장도 없어요. ‘합리’ ‘이성’ ‘품격’ ‘양심’ ‘관용’ ‘아름다움’ ‘올바름’이 멸종위기에 처하고 오로지 ‘네 편-내 편’ ‘강남-강북’ ‘금수저-흙수저’로만 일도양단되는 극단의 사회로 치닫다간 어찌 되겠어요? 200년 뒤엔 강남 여자와 강북 남자가 벌이는 금단의 사랑을 그린 비극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우파’ 집안에 입양되어 자라온 남자가 숨겨온 자신의 ‘좌파’ 유전자에 고민하다 결연히 커밍아웃하면서 집안을 콩가루로 만들어버리는 블랙코미디물 ‘알릴레오’ 같은 하이콘셉트 영화들이 개봉할지도 몰라요. 세금이 유전자 변형 괴물이 되어 인간들의 영혼을 잠식해 나간다는 내용의 공상과학물 ‘세괴(稅怪)’가 나올 수도 있고, 착한 사람들은 감방에 갇히고 사기꾼 강도 강간범 살인범들만이 바깥세상을 자유롭게 활보하는 가치전도 세상을 그린 하이콘셉트 무비 ‘나는 자연인이다’가 기획될 수도 있지요.

영화 이디오크러시에서 주인공 조 바우어는 타임머신을 타고 다시 과거로 돌아가려는 동료에게 이렇게 간곡히 당부합니다. “과거로 돌아가면 사람들에게 꼭 말해줘. 학교에 다니라고! 책을 읽으라고! 제발 머리를 쓰라고!” ‘데모크라시’의 미래는 어쩌면 이디오크러시일지도 몰라요. 자유로운 인간은 자유를 감당해내지 못하고 자꾸만 야만으로 회귀하려 드니까요. 바보 멍청이들이 지배하고 지배받는 디스토피아가 우릴 기다리고 있다고요. 야호!

이승재 영화 칼럼니스트·동아이지에듀 상무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