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레이 기고-다음 100년을 생각한다] <7> 송호근 포스텍 석좌교수
문명국을 자처하던 제국 일본보다 조선의 지성은 훨씬 더 거시적이었다.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질서와 평등을 거론했다. 민족과 세계의 결합을 위해 지적 모험을 감행했다. 당대의 지식인 안재홍의 호가 민세(民世)였다. 일본 유학을 통해 훨씬 통 큰 지성을 배양했던 식자들과 세상 변화에 화들짝 놀라 개과천선한 개신유학자, 토속적 언어와 감성으로 무장한 문인들이 모여들었다. 양기탁 유근 송진우 장덕수가 앞장섰고, 당대 문필가 문필가 이광수가 편집국장으로 합류했다. 현진건 염상섭 채만식 등 문인들, 그리고 민족주의, 사회주의에서 망국의 진로를 탐색했던 사회사상가들이 일대 군단을 이뤘다. 민간지는 유랑지식인들이 모이는 구원 살롱이었다. ‘창조’ ‘폐허’ ‘개벽’ 동인들이 근대지(知)를 탐색하고 있을 때 동아일보는 ‘고등유민(高等遊民)의 소굴’로 유별났다. 민족의 울분과 분노를, 독립을 향한 절규를 술과 글로 달랬던 지사(志士)들이 일필휘지로 시대정신을 벼려 방방곡곡에 타전했다. 나도향 심훈 김기진 임화가 문학전선에 나섰고 이돈화 최남선 신채호 안확 신남철이 신학문을 빚었다. 지사들의 광장이자 생업 현장, 문학자 백철이 썼듯이 1930년대 초기까지 ‘월급을 꼬박꼬박 지급하는 신문사는 동아일보가 유일’했다.
민중의 표현기관. 창간사가 선포한 동아일보의 정체성이 지금껏 퇴색하지 않은 채 지속된 것은 진실과 ‘비판지성’ 외에 어떤 우상도 섬기지 않은 기자 근성과 그것을 금과옥조로 여겼던 언론사의 신념 덕분이었다. 세계 최악의 식민통치에서 민족 언론과 대학을 끝까지 붙들고 있던 나라는 드물었다. 연해주, 상하이, 미국에서 활동한 독립투사들의 소식을 조심스레 보도했지만 당국 검열에 걸려 삭제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동아일보와 함께 민족의 저력을 탐색했던 ‘개벽’ 63호(1925년)는 “무관재상들이 모여 여론을 구성하고 지도한다고 칭하는 신문정부가 탄생했다”고 알렸다. 일제 강점기 내내 동아일보는 검열로 누더기가 된 신문을 그대로 발행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떼어 냈다. 현진건은 그 혐의로 사직했다. 일제 말, 황민화 압제하에서 겪은 고초는 세계 언론사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식민, 전쟁, 독재, 민주를 동시에 겪은 대한민국, 빈곤과 성장과 풍요를 일시에 통과한 한국의 20세기를 지켜낸 등대지기가 언론과 교육이었다. 두 개의 기둥이 없었다면 세계무대에서 유별난 활력의 상징 국가로 지칭되는 오늘날의 한국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196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대학의 최고 인재가 선망한 직업이 언론사 기자였다. 시대 개척의 최전선에 나선다는 청춘의 설렘을 어찌할 수 없었던 탓이다. 필자 역시 기자와 주필이 지상 최고의 직업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사회 현장에서 민중의 삶을 취재하고, 정치전선에서 권력의 이상 징후를 진단하는 직업, 비틀어진 현실을 문장으로 재현하고 혁파하는 지식노동은 속(俗)의 바다에서 건진 성(聖), 그 자체였다. 당대의 민간지 논객 김중배 송건호 선우휘는 청년 시절 필자의 선망이었다. 그들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위대하게 만든 언론이 위대했다. 좌고우면하지 않고 권력에 대항할 수 있는 당랑거철의 용기, 그것을 옹호하는 언론의 기개가 위대했다. 자고로, 한 사회가 발전하려면 공중이 존경심을 결코 철회하지 않는 공적 기관이 우뚝 존재해야 한다. 동아일보는 존경심의 중심에 놓인 비판 지성의 성채였다. 필자가 학문(學門)에 들어선 이후에도 언론의 마력, ‘공론의 등대지기’ 유혹을 끝내 뿌리치지 못해 칼럼니스트가 된 이유다.
100년이 지난 오늘날 언론사와 기자가 직면한 현실은 간단치 않다. 종이신문이 밀리고, 언론 패러다임이 뒤바뀌는 현실과 대면했다. 신문 독자들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대거 이동했다.
수년 전 서울대, 필자의 수강생 50명 중 종이신문을 구독하는 학생은 불과 3명이었다. 포털 사이트가 종이신문이 생산한 기사를 퍼 날라 공짜 비즈니스로 돈을 버는 시대다. 종이신문 기자들은 포털 사이트를 살찌우는 무료봉사 대원이다. 종이신문 1부는 고작해야 1000원짜리다. 수백 명의 기자가 1000원짜리 상품을 제조하려 온 종일 뛰어다닌다. 1잔 4000원, 커피숍보다 사정이 못하다. 2018년 통계에 의하면 한국인의 커피 구매량은 연평균 353잔, 하루에 한 잔꼴이다. 2017년 신문구독률은 약 10%, 10명 중 9명은 안 본다.
인터넷 신문이 1000여 개 난립하는 시대, 심지어 1인 신문, 1인 방송이 활약하고 유튜버가 고소득을 올리는 시대에 100년 신문 동아일보의 미래 행로는 무엇인가. 기사의 가격이 폭락하고, 기자의 몸값이 형편없이 떨어진 이 시대, 언론은 생존전략을 고민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특급 인재들도 노후 보장이 어려운 기자직을 외면한다. 그와 함께 눈빛이 형형한 청년도, 남다른 지성인도 다른 직종으로 비켜간다. 비판지성의 저수원은 나날이 고갈되고 있다. 그리하여 민족의 한 맺힌 백년을 지켜온 동아일보가 적자를 경계하고, 언론사의 집단지성이 하릴없이 추락하는 현실은 모든 민간지에 가해진 기술 변혁의 공습이다.
언론은 결코 잠들지 않는 더듬이를 치켜든 채 기자가 채취한 허위와 음모의 그림판에서 사실과 진실을 캐 세상에 알리는 유일한 기관이다. 신문이 없으면 공론장은 위험하다. 진짜와 가짜 구별이 어렵다. 포퓰리즘적 독재가 좋아하는 것이 ‘신문 없는 공론정부’다. 시류 편승 신문과 정론직필 신문, 오락과 흥미 위주의 다양한 매체가 난립하는 시대에, 100년 민족지 동아일보는 ‘인공지능(AI)시대 언론’의 좌표를 만들어야 한다. 100년 존속의 자부심이자 시대적 과제다.
언론이 아니곤 누가 권력과 지배층에 대적하랴. 언론이 아니곤 누가 AI 시대 인간적 위험을 경고하랴. 언론이 아니곤 누가 공중의 각성을 촉구하고, 미래 행로를 제시하랴. 100년 전, 암흑의 시대에 태어나 간난의 세월을 거쳐 온 동아일보의 지성 유전자는 미래에도 ‘공론정부’를 자임할 충분한 자격을 갖췄다. 이를 두고 ‘문화자본’이라 부르는 까닭이다. SNS에 열중하는 공중들도 말한다. 21세기 불확실성의 시대, 우리 곁에 있어 달라고, 무관재상의 기개를 펴 달라고.
송호근 포스텍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