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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 건너간 한인들이 세운 ‘신한촌’… 해외 독립운동 상징으로

입력 | 2020-01-18 03:00:00

[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89화>러시아 上




러시아 극동함대 사령부가 있는 블라디보스토크는 겨울에도 이용할 수 있는 부동항이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은 함경남도 원산항에서 기선(汽船)을 이용하거나 육로로 두만강을 건너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사진은 독수리전망대에서 촬영한 블라디보스토크 전경. 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러시아 극동 연해주의 최대 항만도시이자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유럽 도시’로 불리는 블라디보스토크. 인천국제공항에서 비행기로 2시간 정도 걸리는 이곳은 100년 전까지만 해도 해삼위(海蔘崴)라 불리며 두만강을 건너간 많은 한국인이 새로운 삶을 개척하던 곳이다. 가장 왕성하고도 치열했던 해외 독립운동 기지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블라디보스토크 일본총영사관의 통역관이자 12년간 재러 한인 독립투사들을 탄압했던 기토 가쓰미(실제는 비밀경찰)는 “연해주 거주 조선인은 약 17만 명으로 대개 농업에 종사하는데, 그중에 확실히 독립운동에 종사하는 자는 약 1만 명”이라며 일본인에게 매우 위험한 곳이라고 말했을 정도다.(동아일보 1921년 12월 7일)

최근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중심가(오케얀스카야)에 위치한 옛 일본 총영사관 건물(현재는 러시아 지방법원)을 찾았다. 2층 규모의 석조건물 입구에는 일본의 상징인 국화 문양 돌조각이 선명했고 지하에는 여전히 감방시설이 있었다. 현지 안내를 맡은 박환 수원대 교수는 “이 지하 감방에서 숱한 연해주 독립운동가들이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고 설명했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불과 1km가량 떨어진 곳에 한국인의 집단거주지인 신한촌(新韓村)이 자리했다. 하바롭스크 거리로 명명된 이곳은 아무르만 해안이 내려다보이는 산비탈 지대다. 블라디보스토크 한인들이 처음 마을을 이룬 곳은 시내 중심가인 포그라니치나야(카레이스키·고려인) 거리의 개척리(開拓里)였다. 그런데 1911년 봄 러시아 당국은 장티푸스 근절을 핑계로 한인들을 신한촌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후 러시아 기병대 병영지로 사용됐던 개척리 일대는 현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장 비싼 상업지역이 됐다.

도심 한복판에서 변두리 언덕배기로 몰려난 한인들의 삶은 비참했다. 1914년 신한촌을 방문했던 춘원 이광수는 “해삼위 시가를 다 지나고 공동묘지도 지나서 바윗등에 굴 붙듯이 산등성이에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 나타났다”고 묘사했다. 하지만 한인들은 굴하지 않고 달동네 신한촌을 1만여 명이 거주하는 독립운동의 성지로 바꿨다. 한민회, 권업회, 대한광복군 정부, 한민학교, 대한교육청년연합회 등 주요 독립운동 단체들이 이곳에 모여들었다. 1917년에는 러시아 혁명에 자극받은 신한촌 민회가 항일신문인 ‘한인신보’를 발행하기도 했다.


○ 러시아 3·1운동의 본거지 신한촌

1919년 러시아의 3·1만세운동도 이곳에서 점화됐다. 그해 3월 8일 고국에서 육로를 통해 넘어온 동포들에 의해 독립선언 소식이 전해졌다. 김하구(한인신보 주필 역임)는 당일 신한촌 한민학교에서 개최된 기독청년회에서 국내의 시위 소식을 알린 후 한국 독립을 선언했다. 고국 소식에 감동을 받은 참석자들은 모두 만세를 불렀다. 이어 연해주에서도 시위운동이 펼쳐질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고, 삼일여학교 학생들은 태극기까지 준비했다.

그러나 3월 15일로 예정됐던 독립선언식과 가두시위는 일제의 압력을 받은 러시아 당국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일본과의 관계를 해치는 일체의 행위를 엄금하겠다는 명령이 내려짐에 따라 수포로 돌아간다. 만세운동을 추진하던 신한촌 민회와 ‘대한국민의회’에 대해서도 폐쇄령이 내려졌다. 대한국민의회는 1919년 2월 25일 전로국내조선인대회에서 출범한 단체로, 해외에서 설립된 최초의 임시정부로 평가받고 있다.

한인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와 러시아 정부의 방해에도 굴하지 않았다. 대한국민의회 회장 문창범은 3월 17일 오전 9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112km 떨어진 우수리스크(당시 니코리스크)의 동흥학교(코리사코프 거리) 앞 광장에서 독립선언서를 기습 발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지 않은 우수리스크에서 러시아지역 최초의 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1920년 3월 1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거행된 3·1운동 1주년 기념식(일본 외무성 사료관 소장). 태극기가 펄럭이는 식장에 2만여 한인들이 참석했다. 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당시 시베리아에 있던 미군은 이날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본국에 보고했다. “조국으로부터 기쁜 소식을 들은 2000명가량의 한국인은 모여 만세를 부르며 한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무장한 30명 이상의 일본군이 출동해 단상에서 연설하던 류영낙을 체포했다. 그러나 군중이 저지해 류 씨를 되찾았다.”

한국인들의 거센 저항에 당황한 일제 헌병대는 결국 러시아에 강력한 단속을 요구했고, 러시아 당국은 군인들을 동원해 공포 50발을 발사하며 군중을 해산시켰다.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던 조선인 사범학교 학생 4명은 그 자리에서 체포됐다.

우수리스크의 시위는 이후 본격적인 러시아 지역 만세운동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체포를 피한 문창범은 같은 날 오후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 다시 독립선언과 시위운동을 주도했다. 이를 지지하는 한인 상점과 학교들이 모두 문을 닫았다. 오후 3시 한인 청년들이 블라디보스토크 일본 총영사관을 찾아가 “일본 정부에 전달하라”며 대한국민의회 명의로 한글과 러시아어로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건넸다. 또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11개국 영사관과 러시아 관공서에도 독립선언서를 배포했다.

오후 4시 신한촌에서는 축제가 펼쳐졌다. 집집마다 태극기를 내건 가운데 대한국민의회 주최로 독립선언식이 거행됐다. 한인들은 큰길로 나아가 연설하고 독립선언서를 뿌리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일본이 러시아 관헌에게 제재를 요구하자 청년과 학생들이 집회 장소를 신한촌에서 블라디보스토크 시내로 옮겼다. 청년과 학생들은 오후 6시 해가 저물어 얼굴을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둑해지자 자동차대(自動車隊)를 조직했다. 이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자동차 3대와 마차 2대에 나눠 타고는 시내를 누비면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선언서를 뿌리며 시위를 이어갔다.(독립신문 1920년 4월 8일)

오후 7시 반 러시아 관헌들은 시위를 막고 학생들을 체포한 뒤 신한촌에 내걸린 태극기를 모두 내리게 했다. 하지만 시위의 불길은 꺼지지 않았다. 다음 날인 3월 18일 한인 노동자들은 총파업을 단행하고 신한촌에 집결하여 시위를 재개했다.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에서 전개된 3·1운동은 이후 한인들이 살고 있는 연해주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한인 초기 정착지인 연추와 포시예트를 비롯해 니콜라옙스크, 스파스크, 라즈돌노예, 하바롭스크, 이르쿠츠크 등에서 수백 명의 한인이 모여 독립선언과 시위운동을 벌였다.(박환, ‘대한국민의회와 연해주지역 3·1운동의 전개’)


○ 남북을 아우르는 항일운동기념탑

이듬해인 1920년 3월 1일 신한촌의 한민학교에서 성대한 잔치가 펼쳐졌다. 대한국민의회와 신한촌 민회가 주최하는 ‘3·1독립선언기념축하식’이었다. 연해주 각 지역에서 2만여 명의 한인이 모였고, 블라디보스토크 유력 인사들도 초대됐다.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각국 영사,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정부 대표 및 블라디보스토크시 위수사령관 등 러시아 관헌, 각 신문사 대표 등도 참가했다.

1999년 8월 15일 한국의 민간단체가 세운 항일운동기념탑. 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이날 축하식에서 독립을 위한 항일 무력 투쟁을 호소하는 다음과 같은 연설도 진행됐다. “대한의 독립은 피를 흘려야 할지니, 동포여 무력을 예비하라. 저 포악한 적과 최후의 전(戰)을 할 결심을 가지라.”(독립신문 1920년 3월 6일)

1년 전과 분위기가 크게 달라진 것이다. 이는 그해 1월 일본군이 지원하던 블라디보스토크 백위파 정권(소비에트 정권의 반대세력)이 한인 독립운동에 우호적인 적군파(혁명파) 정권에 무너졌기에 가능했다. 일제는 행사를 막기 위해 무장군인을 출동시켰지만 러시아 혁명군이 그들을 막아섰다.

한인들은 신한촌 입구 길 양편에 붉은색 나무기둥을 세우고 윗부분을 솔가지로 장식한 ‘독립문’을 세웠다. 문 상단에는 ‘삼월일일 조선독립기념’이라는 문구도 새겨 넣었다. 현재 이 독립문은 사진으로만 남아 있고, 독립문이 있던 자리는 나무들이 듬성듬성 있는 소공원으로 바뀌었다. 김하구가 3·1만세운동을 촉구하고 3·1운동 1주년 행사를 치렀던 한민학교 자리에도 러시아인들이 사는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다. 상해임시정부 초대 총리 이동휘의 거주지에는 상점이 자리 잡고 있다.

다만 ‘신한촌 항일운동기념탑’과 ‘서울스카야(서울거리) 2A’라는 주소판 정도가 100년 전 신한촌의 뜨거웠던 추억을 알려줄 뿐이다. 기념탑은 세 개의 길고도 큰 비석이 중앙에 세워져 있고, 그 주위로 8개의 작은 돌비석이 에워싼 형태였다. 박 교수는 “세 개의 큰 비석은 남한과 북한, 그리고 러시아 거주 고려인을 의미하며, 8개의 작은 비석은 조선 8도를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하나가 된 조국을 염원하는 기념탑이었다.


▼ 이준 열사-안중근 의사 거쳐 간 블라디보스토크역 ▼

시베리아횡단열차의 종착지, 연해주-만주 항일투사들 이용
한인 강제이주 눈물 어려… 홍범도 장군도 카자흐 끌려가

시베리아횡단열차의 종착점인 블라디보스토크역. 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중심의 중앙혁명광장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역은 한국인들과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다. 1893년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 구간이 개통되면서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이 역은 세계 최장의 시베리아횡단열차(9334km)의 종착지로 유명하다. 또 연해주와 만주를 무대로 독립전쟁을 펼치던 항일투사들이 수시로 이용했던 곳이기도 하다.

인연의 시작은 1907년. 헤이그 특사들이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이 역사를 찾았다. ‘을사늑약(1905년)의 부당함과 일제의 침략상을 세계에 알리라’는 고종 황제의 밀명과 밀지를 가슴에 품은 이상설과 이준은 그해 5월 21일 블라디보스토크역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하는 열차를 탔다. 보름 만인 6월 4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위종과 합류한 특사들은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해 일본의 침략 행위를 규탄했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한 안중근도 이 역을 이용했다. 안중근은 그해 2월 7일(음력) 러시아령 한인 초기 정착지인 연추 하리(下里)에서 동지 12명과 함께 왼손 무명지를 자르고, 태극기에 ‘대한독립’이라고 혈서(血書)를 쓴 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한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 한인들의 정착지인 개척리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를 시찰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이때 개척리 한인사회 지도자 최재형은 안중근에게 브라우닝 권총을 구해주는 등 거사를 지원했다. 마침내 10월 21일 오전 8시 50분 블라디보스토크역에서 안중근은 동지 우덕순과 함께 권총을 가슴에 품고 거사를 실행했다. 이 밖에도 많은 무명의 독립투사가 블라디보스토크역을 이용해 독립운동을 벌였다.

러시아 한인 독립운동사의 마지막 장면도 이 역에서 펼쳐졌다. 1937년 스탈린이 실시한 한인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영문도 모른 채 기차를 탄 한인들은 중앙아시아 등 러시아 각지로 흩어졌다. 봉오동전투의 주역 홍범도도 이때 카자흐스탄으로 끌려갔다. 박환 수원대 교수는 “중앙혁명광장이 블라디보스토크의 상징이라면, 블라디보스토크역은 한인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꼽힌다”고 말했다.

블라디보스토크·우수리스크=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