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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에 몰린 한미동맹과 ‘콧수염 징크스’[하태원 기자의 우아한]

입력 | 2020-01-19 14:00:00


16일 한 외신과의 인터뷰 도중 해리스 대사가 콧수염 모양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블룸버그통신 이지혜 기자 트위터 캡쳐. @TheJihyeLee


‘콧수염(mustache) 징크스’ 라고 해야 할까요? 이상 징후가 뚜렷해 보이는 한미동맹에 콧수염 리스크가 다시 한번 급부상하고 있습니다. 2018년 7월 주한미국대사로 부임한 해리 해리스의 그 콧수염입니다. 해리스 대사는 미국 태평양군 사령관 자리에서 물러나 주한미국대사로 부임하기 직전부터 콧수염을 기르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역 장성시절의 해리스 대사. 깔끔하게 면도를 한 모습이 눈에 띈다. 출처 AFP


당·정·청을 심각하게 자극한 해리스 대사의 발언은 지난 16일 외신기자들을 상대로 한 간담회에서 나왔습니다. 개별관광 등 한국의 남북협력 추진 구상을 두고 “향후 제재를 촉발할 수 있는 오해를 피하려면 한미 워킹그룹을 통해서 다루는 것이 낫다”고 말한 것이 문제가 됐습니다.

‘386 운동권’ 출신 여권 핵심정치인의 입에서는 ‘조선총독’ 이라는 거친 언사가 나왔고 통일부 대변인은 공개적으로 ‘주권(sovereignty)’을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신년사와 기자회견 등을 통해 공을 들여온 남북관계 구상에 사사건건 제동을 거는 듯한 태도에 더 이상 이대로 묵과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입니다.

보다 적극적인 대북정책 추진을 공언한 청와대는 “주재국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언론에 공개적으로 언급한 부분은 대단히 부적절했다”고 비판했습니다. 사실상 외교상 기피인물을 뜻하는 ‘페르소나 논 그라타(persona non grata)’로 규정한 셈입니다.


해리스 대사 측도 마음이 많이 상한 듯한 모습입니다. 사실 애초 계획대로라면 호주주재 미국대사로 갈 운명이었지만 빅터 차 내정자의 주한미국대사 카드가 불발되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뜻에 따라 서울행 비행기를 타게 된 해리스 대사입니다.

해리스는 최근 몇 차례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콧수염과 조상(일본계 미국인) 논란에 대해 불편한 심경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안중근 의사(왼쪽)와 도산 안창호 선생.


강점기 일본의 총독 8명 모두가 콧수염을 길렀다는 지적에 대해 콧수염으로 따지자면 안중근 의사, 안창호 선생 같은 독립 운동가들도 콧수염을 기르지 않았느냐는 반문입니다.

콧수염의 악연은 사실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때부터 시작됐습니다. 남북화해협력을 강력 지지하는 진보진영 인사들에게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로 지난해 트럼프 대통령에게서 해고 통지를 받았던 그 인물 말입니다.

그의 콧수염을 공개적으로 직접 언급하지 않았지만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볼턴 전 보좌관을 겨냥해 ‘재수없는 사람’이라고 지칭하기도 했습니다.

지난해 7월 외교부 청사를 찾은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왼쪽 사진 오른쪽)과 해리스 대사. 오른쪽 사진은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미국 대표로 참석한 볼턴 보좌관의 모습.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 책임의 상당 부분이 볼턴에게 있다는 취지의 발언이었는데 “점잖지 못한 표현이지만,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 매우 재수 없는 사람이다. 그 사람을 보면 인디언 영화에 나오는 백인 대장 같다. 인디언을 죽이면서도 가책을 안 느끼는 기병대 대장 말이다”라고 지적했습니다.

트럼프의 결심으로 볼턴 보좌관은 이제 한미동맹 현안을 다루는 최전선에서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해리스 대사의 콧수염을 당분간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당정청의 총공격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해리스 대사를 굳게 신뢰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해리스 대사 역시 논란이 되고 있는 콧수염에 대해 “자를 생각이 전혀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하태원 채널A 보도제작팀 부장급(정치학 박사 수료) triplet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