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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의 부장들’ 우민호 감독 “역사의 물음표와 논쟁은 관객의 몫”

입력 | 2020-01-20 03:00:00

본보 연재됐던 ‘남산의 부장들’ 영화로 만든 우민호 감독




영화 ‘남산의 부장들’은 1990년대 동아일보 인기 연재물이자 한일 양국에서 약 52만 부가 판매된 김충식 가천대 교수의 논픽션 베스트셀러를 바탕으로 했다. 우민호 감독은 “원작이 가진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문체가 갖는 힘을 영화에 담아내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어떤 이야기는 수수께끼처럼 남아 주위에 오랫동안 맴돈다. 우민호 감독(49)에게는 책 ‘남산의 부장들’(김충식 지음·폴리티쿠스)이 그랬다. 군에서 제대한 후 우연히 접한 이 책은 단숨에 그를 매료시켰다. ‘내부자들’(2015년), ‘마약왕’(2018년) 등 사회에 단단히 발붙인 이야기에서 시작해 그 이면을 좇아온 그가 ‘10·26’을 배경으로 한 ‘남산의 부장들’(22일 개봉)로 돌아왔다. 누구나 아는 이야기지만 ‘왜 그 사건이 벌어졌는가’라는 질문에 누구도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소재를 선택한 그를 서울 광화문의 제작사 하이브미디어코프에서 만났다.

“원작은 중앙정보부의 시작과 끝, 현대사의 주요 장면을 880쪽이라는 방대한 분량으로 이야기하는데 너무 매력적이었어요. 영화로 만들면 10시간짜리는 될 텐데 3부작으로 만들어 볼까 생각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우 감독은 10·26을 특수한 역사적 사건이면서 동시에 어느 조직사회에서나 있을 수 있는 보편적 사건으로 해석했다. “그 사건이 뚜렷한 대의명분이나 논리적 인과관계가 아니라 인물들 사이의 감정과 관계, 그리고 그것의 파열과 균열에서 시작되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 사건을 거시적으로 보여주기보다는 인물의 내면과 심리를 극대화하는 데 집중했어요.”

영화는 중앙정보부장 김규평(이병헌)과 경호실장 곽상천(이희준)의 충성 경쟁, 권력의 정점에 있는 박통(이성민), 미국에서 정권의 치부를 폭로한 전 중정부장 박용각(곽도원)을 오가며 대통령 시해 발생 전 40일을 재구성했다.

충성이 흔들리는 2인자 ‘김규평’을 연기한 이병헌(위 사진). 유신의 끝자락, 불안과 분노를 표출하는 ‘박통’ 역의 이성민(가운데 사진). 목숨을 걸고 권력의 비밀을 폭로 하며 배수진을 치는 ‘박용각’ 역의 곽도원. 쇼박스 제공

실화가 갖는 흡인력에 빈틈없는 대사, 베테랑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가 밀도를 더한다. 배우들은 예민한 지진계처럼 아주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감정까지 묘사하고 카메라는 이들의 감정 변화를 집요하면서도 절제된 화면으로 잡아낸다. 시사 후 원작자 김충식 가천대 교수는 우 감독에게 ‘내가 만든 사진첩을 풍경화로 그려낸 것 같다’는 평을 남겼다.

“원작의 이야기와 문체가 갖는 힘이 좋았어요. 흥분하지 않으면서 깊고 날카롭게 파헤치는 태도와 시선을 영화에서는 감독의 시선으로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감독의 의도에 맞춰 배우들의 연기는 압도적이다. 이병헌은 눈빛은 물론 한 올 흐트러짐 없는 머리카락까지도 충성스러운 부하에서 평정심을 잃어가는 김규평을 재현한다. 2인자들의 암투 속에서 히스테릭해지는 박통의 불안과 공포를 이성민은 실감나게 그려냈다. 궁정동 안가(安家)의 텅 빈 방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 ‘황성옛터’를 부르는 장면은 권력 이면의 허무함 자체다.

연기가 원작의 집요함을 닮았다면 카메라는 날카롭고 절제된 필체를 닮았다. 우 감독은 1970년대 어딘가에 그대로 카메라를 들이민 듯 빈틈없이 고증해 절제된 영상미로 표현했다. 미국으로 도피한 박용각이 체류한 워싱턴, 그가 실종된 프랑스 방돔광장은 어렵게 촬영 허가를 얻어 화면에 담았다.

“종이 한 장만 봐도 그때 쓰던 것이 달라요. 당시 유행하던 옷을 참고해 디자인하고 사진 속 즐겨 입던 스타일도 참고했죠. 박통의 양복은 실제 그때 대통령 양복을 지었던 분에게 의뢰했습니다.”

평가가 끝나지 않은 역사는 계속 물음표와 논쟁을 남긴다. 그는 “영화가 관객에게 물음표를 주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며 덧붙였다.

“사건 속 인물들에 여러 요소가 복합돼 있어 더 흥미로웠습니다. 충성과 배신, 존중과 우정, 의리 같은 보편적인 감정이 소용돌이칩니다. 어느 조직이나, 심지어 가족 사이에도 있을 수 있는 충돌인데 분명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죠. 인물의 행동이 쉽게 설명되지 않는 지점에 대한 판단은 관객이 해주셨으면 합니다. 계속 물음표를 찾아 나서면서 여러 세대가 대화할 수 있는 좋은 소재가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서현 기자 newstar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