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미-이란 갈등의 또 다른 축
카이로=이세형 특파원
이란 핵 개발 억제에만 주력했던 조지 W 부시, 버락 오바마 전 미 행정부와 달리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2017년 출범 직후부터 줄곧 이란의 ‘시아파 벨트’ 전략을 핵 개발 못지않은 중동의 주요 위협으로 여기고 대응해 왔다. 솔레이마니는 이 시아파 벨트를 구축하고 유지하는 데 핵심 역할을 담당한 인물이다. 시아파가 집권한 이라크에서는 “장관 인사도 솔레이마니의 결재를 받아야 가능하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양측의 갈등은 상당 기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솔레이마니를 추종하는 각국 시아파 무장조직이 국지적 테러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미국을 필두로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등 친미 성향 수니파 중동국들은 이를 좌시하지 않고 맞대응할 것으로 보인다.
○ 트럼프, 대선 앞두고 시아파 벨트 압박 강화
11월 대선 승리가 지상 과제인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핵심 지지 기반인 이들의 요구를 무시하기 어려운 처지다. 북한 비핵화 협상, 베네수엘라 사태 등 외교안보 핵심 정책들에서 뚜렷한 가시적 성과를 내지 못한 트럼프 대통령으로선 강한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란 최고위 인사인 솔레이마니를 제3국인 이라크 바그다드 공항에서 공개 사살한 것은 핵심 지지층에 어필하는 최고의 카드로 꼽힌다. 세계 최강대국의 위상을 드높이고 ‘해결사’ 이미지를 강조했다는 이유에서다.
이스라엘 정보기술(IT) 기업에 근무하는 한 유대계 미국인은 “트럼프 대통령은 누가 뭐래도 보수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이 원하는 중동정책을 구사한다. 11월 대선에서도 이런 성향의 유권자들은 트럼프를 지지하고 그에게 많은 기부를 할 것”이라며 “트럼프 대통령도 이를 잘 알기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란을 더 압박할 것”으로 예상했다.
트럼프 행정부 내에 유달리 유대계 핵심 인사가 많다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대통령의 맏사위 재러드 쿠슈너 백악관 선임고문(39), 스티븐 므누신 재무장관(58) 등이 대표적이다. 원래 기독교인이었던 트럼프 대통령의 장녀 이방카 백악관 선임고문(39)도 결혼 후 남편을 따라 유대교로 개종했다. 지난해 9월 사퇴한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72) 역시 부시 행정부 시절 이란, 북한, 이라크를 ‘악의 축(Axis of evil)’으로 규정하고 3개국에 대한 선제공격을 주장했을 정도로 반이란 성향이 강하다.
○ ‘완성된 시아파 벨트’ 포기 못 하는 이란
이란은 시아파 벨트를 통해 상당한 정치·안보상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 현재 레바논 헤즈볼라, 예멘 후티 반군, 카타입헤즈볼라(KH)를 필두로 한 이라크 시아파 민병대, 팔레스타인 하마스 등은 모두 직간접적으로 쿠드스군의 지원을 받고 있다. 이란은 이들을 통해 굳이 자국 군대를 동원하지 않고서도 ‘주적(主敵)’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를 군사적으로 압박할 수 있다.
또 자국 국민과 영토에 피해를 입히지 않고 타국 땅에서 수니파와 ‘대리전’을 치르는 일도 용이하다. 이란이 지원하는 후티 반군과 사우디, UAE가 지원하는 정부군의 대립으로 2015년 이후 6년째 내전 중인 예멘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시아파 벨트 덕분에 수니파 극단주의 테러단체 이슬람국가(IS)도 비교적 손쉽게 격퇴할 수 있었다. 2014년 IS가 시리아와 이라크에서 자칭 ‘칼리프 국가’를 건설했다고 주장할 때 IS를 저지하는 지상전을 주로 담당한 인력은 이란의 지원을 받은 시아파 무장단체였다. 미국 등 서방은 사실상 공군만 지원했고 실질적인 효과가 큰 지상전은 인명 피해 등을 우려해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IS 피해를 겪은 이들 나라에서는 이란과 시아파 민병대에 대한 호의적 여론이 높아졌다.
이란의 지원을 받는 시아파 무장단체들은 대부분 현지 정당, 주요 정치인들과 깊숙이 연을 맺고 있다. 시위, 여론, 선거 같은 비(非)군사적 방법으로 시아파 벨트 내 국가에 압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라크와 레바논은 이미 국회의원과 정부 고위 관계자들의 상당수가 친이란 성향이다. 중동 외교 소식통은 “핵무기를 개발하려면 서구의 제재가 엄청나다. 또 개발을 완료한다 해도 이를 손쉽게 사용하기도 어렵다. 반면 시아파 벨트는 핵개발보다 적은 비용을 들이고도 이미 완성됐을뿐더러 그 효과도 입증됐다. 이란 입장에서는 포기하는 일이 쉽지 않다”고 진단했다.
친이란 성향인 시아파 벨트 국가의 지도층과 달리 국민들의 민심은 반정부, 반이란 성향이라는 점은 사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지난해 10월부터 이라크, 레바논, 시리아에서는 고질적 경제난으로 인한 민생고, 이란의 과도한 내정 간섭에 항의하는 반정부 시위가 거세게 일었다. 이들은 “국민들은 극심한 생활고를 겪고 있는데도 집권 세력은 이란의 지원을 받으며 권력 유지에만 골몰한다. 이로 인해 개혁이 미뤄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이란 내부에서도 “시아파 벨트 구축에만 바빠 정작 국민들의 삶은 도외시한다”는 불만이 적지 않다. 지난해 11월 유류세 인상으로 이란 전역에서 대대적인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던 이유다.
반정부 시위로 이란의 시아파 벨트 장악력에 균열이 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 와중에 발생한 미국의 솔레이마니 제거는 잠시 이 지역의 반미 여론을 결집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이란의 우크라이나 민항기 오인 격추로 여론은 반전됐다. 이들 국가의 민생고가 워낙 심한 데다 시위 형태도 상당히 폭력적이어서 향후 반정부 시위와 각국 정부의 진압 양상에 따라 더 큰 후폭풍이 몰아닥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 와중에 레바논과 이라크의 친이란 무장단체들은 솔레이마니를 제거한 미국에 대한 복수 의사를 거듭 밝히고 있다. KH가 지난해 12월 27일 이라크 미군기지를 공격해 미국인 1명을 숨지게 한 사건에서 보듯 이들이 미국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면 미국 역시 보복 공격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이스라엘, 사우디, UAE 등도 직간접적으로 이런 대립에 가담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우디는 이미 지난해 9월 예멘 후티 반군 및 이란이 시도한 것으로 추정되는 공격으로 국영 석유사 아람코의 생산시설이 파괴되기도 했다.
예멘의 정정 불안도 고조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WP) 등은 미국이 솔레이마니를 암살할 때 쿠드스군 자금 총책인 압둘 레자 샤흘라이도 예멘 수도 사나에서 동시에 제거하려 했지만 실패했다고 전했다. 미국은 수십 개 가명으로 활동하는 샤흘라이를 잡기 위해 1500만 달러의 현상금까지 걸었다. 샤흘라이를 필두로 예멘에서 활동하는 쿠드스군과 반미 세력들이 언제든 미국을 공격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로이터통신 등은 18일(현지 시간) 후티 반군이 탄도미사일과 드론 등을 사용해 예멘 사나 인근의 정부군 훈련소를 공격했다고 전했다. 이로 인해 군인 60명이 숨지고 수십 명이 다쳤다.
미국과 이란 정부가 모두 상당 기간 자국 지지층을 위해 시아파 벨트를 이용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트럼프 행정부는 재선을 위해 대(對)이란 강경책을 고수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와 혁명수비대 역시 경제난과 민항기 오인 격추에 따른 반발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서라도 ‘외부의 적’ 미국에 화살을 돌리려 할 것으로 보인다.
카이로=이세형 특파원 turt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