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학생들이 금융 관련 학위에 도전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 아마 금융은 여성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정형화된 편견이 주된 이유일 것이다. 진정한 양성평등을 실현하려면 이렇게 여성의 직업적 진출을 가로막는 편견과 고정관념을 깨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글로벌 금융정보 서비스 업체 블룸버그는 해마다 양성평등지수(Gender-Equality Index· GEI)를 발표한다. 여성의 직장 내 지위 향상에 힘쓰는 기업들을 선정해 그들의 재무실적을 집계하는 인덱스로, 양성평등 확산을 위한 전사적 노력의 일환이다. 또 블룸버그는 자사의 TV 채널에 자주 노출되는 앵커와 보조 출연자를 가능한 한 여성으로 채우려 힘쓰고 있다. 그 결과 과거에는 방송에 출연하는 펀드매니저들이 대부분 남성이었지만 지금은 여성 펀드매니저나 금융전문가를 흔히 볼 수 있다. 여성과 금융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잘못된 고정관념은 이런 노력들에 의해 하나씩 깨질 것이다.
자본시장의 역할도 중요하다. 최근 미국의 자선사업가 멀린다 게이츠는 경영 저널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에 보낸 글에서, 남성과 여성의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이해당사자와 금융자본 간 협업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펼쳤다. 게이츠는 미국에서 벌어지는 양성평등 캠페인들이 대부분 자금 부족에 시달려 왔음을 지적했다. 자선가, 벤처투자가, 기업, 정책입안자들의 참여가 늘어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때로는 강제적 수단이 효과적일 때가 있다. 이런 측면에서 주주행동주의는 하나의 큰 가능성을 제시한다. 얼마 전 캐나다연금투자위원회(CPPIB)에서는 연금이 투자한 기업 중 여성이 없는 이사회를 퇴진시키는 쪽으로 주주 권한을 행사하겠다고 압박했다. 그 결과 많은 기업이 한 명 이상의 여성을 이사회에 선임했다.
이처럼 주주는 투표를 통해 기업이 양성평등을 촉진하기 위한 전면적인 변화를 단행하도록 압박할 수 있다. 임금 책정과 승진 여부의 투명성을 강화하는 것이 첫걸음이다. 자본의 힘을 통해 이 같은 강제적 조치가 더해지고, 실제로 양성평등이 기업 스스로에 유리하다는 인식이 확산된다면 진정한 양성평등이 실현되는 시점을 훨씬 앞당길 수 있다.
한국의 경우 지금까지 각종 공적기금이 양성평등 이슈에 대해 의견을 내거나 관심을 보인 적은 없다(국내에선 7월부터 여성 등기임원 의무화제도 시행 예정). 현 상황으로서는 공적기금의 역할을 기대하기보다는 민간자본을 통한 압박으로 기업에서의 양성평등 움직임을 구체화하는 방법이 보다 현실적인 수단으로 보인다. 즉, 양성평등 이슈를 중시하며 구체적인 실천 계획을 세우는 기업에 지속적으로 투자하는 펀드에 개인투자자들이 적은 금액이라도 참여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 한국이 양성평등의 모범 국가가 되는 날을 기대해본다.
※ 이 원고는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 코리아 2020년 1·2월호에 게재된 ‘금융인의 시각으로 본 양성평등 문제와 개선책’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존 리 메리츠자산운용 대표 john.lee@meritz.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