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 아닌 현실 잣대로 정권 평가… 신정국가도 먹고사는 문제로 심판
고기정 경제부장
#2. 중국 연수 시절 같은 학교에 다니던 이란인 A가 갑자기 베이징의 한국국제학교에 대해 물어왔다. 해외에 계속 눌러앉을 생각으로 아들 둘을 보낼 국제학교를 찾다 학비가 제일 싼 한국국제학교가 눈에 들어왔단다. 한국국제학교는 국제학교라고는 하지만 영어가 아닌 한국어로 한국 교육과정을 가르치는 곳이다. 사정을 설명해줬더니 난감한 기색이었다. A는 독실한 무슬림이었지만 귀국할 생각이 없었다. 이란을 제재하는 미국도 싫지만 부패한 혁명세력은 더 싫다고 했다.
최근 이란에서 민간 여객기 격추를 계기로 반정부 시위가 확산되고 그 이면에는 경제난이 자리하고 있다는 소식이 내겐 ‘정해진 미래’처럼 들렸다. 신정(神政)국가도 결국엔 먹고사는 문제로 평가 받는다.
이란이 혁명이라는 터널의 출구 근처에 있다면 요즘 우리는 그 입구에 막 들어선 것 같은 느낌이다. 민주화 이후로 집권세력이 입법과 사법까지 장악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이들은 현재의 권력지형은 ‘촛불혁명’의 결과물이고, 다음 총선은 촛불혁명의 완성이라고들 한다. 여당 원내대표는 정권 교체를 넘어 사회적 패권 교체까지 이룩하겠다고 했다.
혁명을 완성하든, 패권을 바꾸든 방법이야 상관없다. 국가가 지금보다 부강해지고 생활형편이 나아진다면 뭐가 문제이겠는가. 하지만 혁명 운운하며 오래된 신념체계로 현실을 가리려는 것 같아 불안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신년인사회에서 “우리는 조금 느리게 보이더라도 함께 가는 것이 더 빠른 길이라는 것을 확인했다”고 했다. 일부 통계에서 소득5분위 배율이 개선됐고, 고용률이 높아진 것을 두고 하는 말인 듯하다. 하지만 현 정부 들어 하위계층의 생활고가 심화됐고 부의 불평등 정도가 악화하고 있으며 고용시장은 뭔가 단단히 고장 나 있음을 보여주는 근거는 차고 넘친다. 함께 가지도 못했고, 더 빠른 길을 택하지도 않은 채 그냥 느리게만 간 게 아니었을까. 청와대의 온갖 회의에 다 참석하며 국정 현안을 꿰뚫고 있는 정무수석이 난데없이 주택거래허가제를 들고 나온 것을 보면 시장경제 자체를 부정하거나, 애초에 경제철학이 부재한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현 집권세력을 지지했다가 이 정부 들어 등을 돌린 사람들은 ‘진보에 대한 부채의식’에서 자유로워졌다고들 한다. 신념이 아닌 현실의 잣대로 평가하게 됐다는 것이다. 신정국가 이란에서처럼 말이다.
고기정 경제부장 ko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