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단독]靑, 배터리 3사-현대車에도 공동개발 ‘압박’

입력 | 2020-01-23 03:00:00

김상조 이어 비서관이 기업 호출



동아일보DB


청와대가 5대 그룹에 공동 신사업 추진을 요구한 데 이어 국내 전기자동차 배터리 3사와 현대자동차에도 미래차 공동 연구개발(R&D)을 요청한 것으로 22일 확인됐다.

재계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중순 강성천 산업통상비서관(당시 산업정책비서관)은 LG화학, 삼성SDI, SK이노베이션 등 국내 배터리 3사와 현대자동차 고위 임원을 청와대로 불러 공동으로 미래차와 차세대 배터리 개발에 나설 방안을 찾아달라고 요구했다. 전기차 배터리를 제2의 반도체로 키우도록 배터리 3사가 힘을 모으면 정부가 적극적으로 투자하겠다는 뜻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강 비서관은 김상조 대통령정책실장이 이끄는 정책실 소속이다.

배터리 업계는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고 있는 회사들이 각자 보유한 핵심 기술을 공유하고 공동 사업을 진행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본다. 한 재계 관계자는 “전기차 배터리 기술은 각 기업이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여 쌓아온 결과이고, 기술 개발은 보안이 핵심”이라고 말했다.

김 실장과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해 11월 5대 그룹이 공동으로 신사업을 진행해 달라고 요구한 바 있다. 홍 부총리는 22일 “공동 프로젝트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는 이야기로 의무적으로 제출하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재계는 “정부는 제안이라 하지만 기업들은 당연히 압박으로 받아들인다”는 분위기다.

▼ 재계 “靑 공동사업 지시 심한 압박감” ▼


김상조 이어 비서관이 기업 호출
“보안 핵심 R&D를 협업하라니… 정부, 시장경제 이해 부족한 듯”
회의 거듭하며 실행계획 찾기 곤혹


“정작 기업들이 느끼고 있는 압박감은 여러 차례 회의를 거듭할 만큼 상당하다.”

22일 익명을 요구한 재계 관계자는 청와대가 5대 그룹에 공동 신사업을 요구한 데 이어 자동차와 배터리 3사를 따로 불러 공동 연구개발(R&D)을 지시한 데 대해 이같이 말했다. “기업 간 합종연횡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 손을 잡는 것이지 청와대가 갑자기 지시한다고 이뤄지지 않는다”며 “공동 신사업처럼 당황스러운 요구가 늘어날까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청와대가 잇달아 정부 주도의 ‘공동 사업’을 요구하자 재계에서는 우려가 크다. 답을 찾기도 어렵지만 정부의 시장경제에 대한 이해 부족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는 것이다.

실제로 LG화학, 삼성SDI, SK이노베이션은 이미 2018년 11월 산업통상자원부의 요청으로 배터리 기술 개발을 위한 1000억 원 규모의 펀드를 조성했지만 현재 투자활동이 중단된 상태다.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이 지난해 영업비밀 침해 관련 소송을 진행하면서다.

한 재계 관계자는 “당장 1000억 원 펀드 공동 운영조차 쉽지 않은 기업들에 미래 기업의 명운을 결정지을 R&D를 협업하라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경제 살리기’ 모습을 과시하려는 정부 입장만 생각한 것 아닌가”라고 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미래차 산업에 있어 업계가 정부 지원을 요청한 것은 중장기 로드맵이나 충전소 등 인프라 육성인데 공동 투자 방안을 마련하라고 하니 곤혹스럽다”고 했다.

5대 그룹 공동 사업화 아이디어를 제출하라는 정부의 요구에 주요 기업들은 회의만 거듭하는 상황이다. 현대자동차그룹은 로봇과 차세대 배터리를, 롯데는 소재 분야에서 협력 방안을 찾아보겠다는 답변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구체적인 실행 계획은 마련하지 못했다. 삼성, SK, LG 등은 여전히 실마리를 찾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선 지난해 경제성장률이 2.0%로 2009년 금융위기 이후 최저인 상황에서 기업에 대한 불합리한 투자 요구가 많아질까 우려스럽다는 반응도 감지된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이익이 있으면 알아서 투자에 나서는 게 기업”이라며 “투자를 어렵게 하는 규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정부가 기업만 어렵게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가 기업에 사업 방향을 정해주는 것처럼 보여 기업이 압박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며 “정부는 기업이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민간이 알아서 사업 방향과 전략을 짜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서동일 dong@donga.com·임현석 기자·지민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