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국가보위성 청사를 방문한 김정은이 간부들과 함께 구내에 새로 세운 김정일 동상을 둘러보고 있다. 동아일보DB
주성하 기자
김정일 동상이 보위성에 건립된다는 것은 여러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사실 김정은 집권 이후 김정일 단독 동상을 구내에 제일 처음 세운 것이 국가보위성이다. 2012년 10월 동상 건립 행사에 김정은도 참석했다.
그런데 2017년 1월 이설주 외가 쪽 친척인 강기섭 민용항공총국장이 보위성에 끌려가 취조를 받던 중 사망하자 김정은이 대로했다. 그는 김원홍을 즉각 해임시켜 조사를 받게 하고 보위성 간부 3명을 처형했다. 그것으로도 화가 풀리지 않아 “국가보위성은 수령님들의 동상을 모실 자격이 없다”며 동상을 즉각 해체하라고 지시했다.
김정은은 북-미 관계가 의도대로 풀리지 않자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나라의 형편이 눈에 띄게 좋아지지 못하고 있다”고 자인하면서 “허리띠를 졸라매더라도 기어이 자력부강, 자력번영하여 나라의 존엄을 지키고 제국주의를 타승하겠다”고 말했다. 이는 수많은 사람이 굶어죽었던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이 다시 시작될 수 있다는 고백이나 다름없다.
경제가 파탄나면 민심 이반은 필연적이다. 주민을 통제하려면 외부를 향해 시선을 돌리게 하거나, 내부적으로 공포통치를 해야 한다.
그러나 외부 도발은 쉽지 않다. 미국의 행동이 예측 불허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이란 군부 실세인 가셈 솔레이마니 쿠드스군 총사령관을 제거했듯이 북한의 도발에 상응한 군사적 보복을 가한다면 김정은은 궁지에 몰린다. 주민을 향해 수십 년 동안 “미국이 무서워하는 위대한 장군”이라 세뇌시켰는데, 미국의 공격을 받고도 가만있으면 비웃음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미국에 보복하려니 감당할 자신이 없다.
결국 김정은이 확실히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내부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불안한 민심을 강압적으로 억누르는 방법밖에 없다. 그걸 위해 보위성이 필요한 것이다.
보위성은 지금쯤 필요한 순간에 간첩으로 둔갑시킬 희생양을 열심히 고르고 있을 터이다. 손쉬운 수법은 북-중 국경에서 외부와 통화하는 사람 몇 명을 몰래 색출해 점찍어둔 뒤 간첩단으로 둔갑시킬 시나리오를 짜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라면 정부가 구상 중인 대북 개별관광이 시작됐을 때 한국인 관광객 중에서도 간첩으로 체포되는 사례가 나올 가능성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과거 보위성이 간첩을 잡았다고 연 기자회견들을 보면 시나리오가 너무 엉성해 실소가 나오는 사례가 많았다. 대표적으로 2016년 7월 16일 노동신문에 주성하란 이름이 10번이나 오르내린 일도 있었다.
당시 북한은 북-중 국경에서 납치한 탈북자 고현철 씨를 간첩이라 발표하는 기자회견에서 “주성하 놈은 ‘동아일보’ 기자의 탈을 쓰고 미국과 괴뢰정보원의 막후조종을 받으며 우리 주민들에 대한 유인납치 만행을 감행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나를 “남조선의 ‘북 인권’ 단체들을 배후조종하는 수잰 숄티의 ‘디펜스포럼’과 연결돼 미국과 남조선의 유인납치 단체들 사이에 자금을 중계해주고 연계를 맺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했다. 숄티 대표를 만난 적도, 대화한 적도 없는데 너무 터무니없이 엮으니 어이가 없었다.
보위성은 발표 내용에 등장하는 다른 탈북민들에 대해선 ‘민족 반역자’라고 지칭하면서 탈북민이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알렸지만, 나에 대해선 그런 수식어를 빼놓았다. 탈북한 사람이 동아일보 기자를 한다는 사실만은 주민에게 숨기고 싶었던 모양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