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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통합 논의, 절박함이 너무 없다[오늘과 내일/이승헌]

입력 | 2020-01-28 03:00:00

총선에서 패배해도 돌아갈 곳 있는 보수
남의 일 이야기하듯 무성의한 통합 논의




이승헌 정치부장

“재래시장에서 나물 값 깎을 때도 이것보단 더 열심히 매달린다고 하더라….”

설 연휴 지역구에 다녀온 자유한국당의 한 중진 의원이 보수통합 논의에 대한 동네 민심이라며 전한 말이다. 총선에서 문재인 정권에 맞서려고 보수통합을 한다는데 워낙 뜨뜻미지근해서 어디까지 와 있는지, 합치기는 하는 건지 도통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보수통합 논의는 이전의 야권통합 논의에 비해 한두 달은 뒤처져 있다. 그만큼 달아오르지 못하고 있다. 지금 통합 논의와 환경이 가장 유사했던 2012년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과 친노 그룹은 2011년 12월 체육관에서 욕지거리에 가까운 논쟁 끝에 합당 대회를 마치고도 간신히 선거를 치를 수 있었다. 이후 통합진보당과의 야권 연대까지 무원칙하게 흘러가면서 총선에서 패했지만, 통합 논의 자체는 총선 일정에 맞춰 속도감 있게 전개됐다.

하지만 보수의 통합 작업은 총선을 79일 앞둔 27일 현재 아직 구체적인 밑그림을 그려내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말부터 나온 “설 연휴 전 통합 윤곽 확정될 것”이라는 호언장담이 무색할 지경이다. 한국당과 새로운보수당 간 통합 협의체, 보수진영이 참여하는 혁신통합추진위원회(통추위) 모두 연휴 기간 공식 회의도 갖지 않았다. 이렇다 보니 벌써부터 김빠지는 소리가 들린다. 통추위에선 합당보다는 통합 선대위 체제로 총선을 치르자는 아이디어가 나온다. 새보수당 유승민 의원은 “후보 단일화, 선거 연대도 옵션”이라고 했다.

필자는 보수통합 논의가 지지부진한 것은 절박함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말로는 보수통합을 강조하지만, 통합 아니면 보수가 총선에서 죽을 수 있다는 진정 어린 위기의식 같은 게 없다. 그렇다면 보수통합 논의에는 왜 절박함이 부족할까. 다들 따로 믿는 구석이 있어서다. 통합에 실패하고 총선에서 망하더라도 누구처럼 폐족(廢族)이 되거나 길거리로 나앉는 게 아니라, 원래 자리로 돌아가 각자도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수 연구실로, 변호사 사무실로, 정 안 되면 갖고 있는 건물로…. 아무것도 안 해도 당분간 먹고살 만큼의 돈도 있다. 한국당, 새보수당은 물론 우리공화당을 포함한 범보수 세력 상당수가 해당된다.

배가 덜 고프다 보니 보수진영은 총선 국면에서 이슈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각 통합 주체들이 국민 눈높이에 맞춰 치열하게 토론하고 필요하면 싸우면서 관심을 끌어야 하는데, 정치철학이나 정치공학 이론만 넘쳐난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통합 논의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보수진영은 이러고도 설 연휴 전 일부 여론조사에서 한국당과 새보수당의 지지율을 합친 것보다 통합보수신당의 지지율이 더 낮게 나온 게 ‘여론 조작’이라고만 주장할 수 있나.

현 시점에서 보수 맏형 격인 황교안 한국당 대표의 리더십도 아쉽다. 통합이 실현되어 총선에서 효과를 본다면 가장 큰 수혜자는 보수진영 차기 대선 주자 1위인 황 대표다. 그렇다면 황 대표는 유승민 의원 집이나 사무실을 몇 번이고 찾아가는 퍼포먼스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지난해 단식 투쟁 때 보여줬던 결기가 필요한 건 정작 지금이다.

보수 일각에선 총선 전에는 통합이 될 수 있으니 시간을 줘야 한다는 말도 나온다. 물론 곧 통합을 선언할 수도 있다. 물밑 논의도 진행 중이다. 하지만 정치 일정에도 골든타임이란 게 있다. 합치기만 한다고 선거를 치를 수는 없다. 이미 꽤 늦었다. 보수의 ‘웰빙 병’은 고질적이다 못해 이번엔 치명적인 수준이다. 한 번 무너진 한국 보수가 건강한 정권 견제세력으로 재기하는 게 이리도 어렵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