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연 사회부 기자
25일 설날 서울 마포구 한 오피스텔. 이곳에선 오전 11시 반경 흔치 않은 모임이 성사됐다. 이름도 특이한 ‘차례상 대신 브런치’. 명절마다 중노동으로 전락한 차례상 차리기를 거부하고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가져보자는 취지다.
이날 모임에 참석한 20대 주남정 씨는 “지난해 추석엔 ‘결혼 언제 하느냐’ ‘그러다 애 못 낳는다’를 귀에 딱지 앉도록 들었다”며 “오늘은 ‘뭘 할 때 행복한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만 4시간 넘게 얘기했다”고 기뻐했다.
모임에 온 여성은 다들 닮은 점이 있었다. 이들에게 명절은 ‘핵노잼’이었다. 주 씨는 “명절마다 큰어머니는 안 쓰는 그릇까지 꺼내 닦으라고 했다. 설거지 마치면 해가 지기 시작했다”며 몸서리쳤다. 또 다른 참가자 김지양 씨는 명절 하면 ‘배틀(battle·전투)’이란 단어가 떠오른단다. 친가 외가 할 것 없이 벌어지는 친척들의 미묘한 신경전. 몸도 마음도 긴장으로 지쳐 연휴가 끝났다.
그래서일까. 모임 참가자들은 오늘을 ‘꿀잼’이라 했다. 특별한 이벤트는 없었다. 그저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자기 속내를 편안하게 털어놨을 뿐. 그마저도 대부분 사소한 것들이었다.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싶어요?” “존댓말이 편한가요?” “혹시 못 먹는 반찬이 있으면 알려줘요.” 그런데도 까르르 웃음이 그치질 않았다.
환한 표정으로 바뀐 이들에게 물어봤다. 사랑하는 가족이 모이는 명절이 왜 괴로워진 걸까.
“실은, 전 사과 알레르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명절에 사과 깎는 건 항상 제 몫이었죠. 줄곧 인상을 찡그렸지만, 누구도 어디 아프냐고 묻질 않았어요. 참, 최근엔 스스로도 부끄러운 일이 있어요. 가장 살가운 친척이 사촌오빠인데, 결혼한 언니 이름조차 기억 못 하더라고요. 의무와 희생만 강요하다 제일 중요한 걸 놓친 건 아닌지…. 반성 많이 했습니다.”(김지양 씨)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고, 다른 사람 이야기를 듣는 게 이렇게 흥미로울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된 기적 같은 시간이었다.’
명절에 필요한 건 거창한 게 아니었다. 약간의 관심과 배려, 그리고 대화였다.
이소연 사회부 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