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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라오스에서도 빛난 한국 의술[이진한의 메디컬 리포트]

입력 | 2020-01-30 03:00:00


김인권 예스병원 원장(가운데)이 라오스 의사 캄반 반살리시(흰 모자)에게 인공엉덩관절 수술법을 지도하고 있다. 서울대 의대 제공

이진한 의학전문기자·의사

2020년 1월 20일 찾은 이곳은 누가 봐도 곧 철거될 듯한 허름한 건물이었다. 건물의 몇몇 창문은 깨친 채 방치됐다. 계단 곳곳에는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말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환자 보호자들이 복도 곳곳에 앉아 직접 만든 음식을 먹는 중이었다. 건물 베란다에는 보호자들이 임시로 만든 잠자리에서 밤을 새우고 있었다.

다름 아닌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에서 가장 대표적인 외상전문병원 미타팝병원의 속 풍경이었다. 라오스는 주 교통수단이 오토바이다. 그러다 보니 오토바이로 인한 교통사고가 많다. 그러나 비엔티안에서조차 교통사고로 인한 무릎과 엉덩관절 손상을 제대로 치료할 의사가 없다.

하지만 불가능했던 인공무릎관절 수술도 이곳에선 할 수 있다. 이 병원 캄반 반살리시 정형외과 전문의가 이종욱-서울 프로젝트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2017년 서울대병원 및 협력의료기관에 파견돼 인공관절 수술을 배웠기 때문이다.

이종욱-서울 프로젝트는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의 지원을 받아 이곳 라오스 의사들을 서울대 의대에 파견해 꼭 필요한 의술을 가르쳐주는 프로그램이다. 2010년부터 10년간 진행돼 올해 마지막으로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1960년대 미네소타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의 미네소타대 의대에서 서울대 의료진 77명이 공부하고 다시 한국에서 의술을 베풀었던 것과 비슷하다. 한국이 선진국으로 거듭나면서 동남아 국가에 의술을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라오스 의료인 164명이 프로그램을 거쳐 갔다.

캄반 전문의는 무릎관절 수술을 가르쳐준 김인권 지도교수(현 예스병원 원장·70)와 함께 4일 동안 미타팝병원 수술실에서 15명의 환자에게 인공무릎관절 및 인공엉덩관절 수술을 진행했다. 재수술 환자 등 모두 상태가 좋지 않는 환자들이었다.

캄반 전문의는 “교육받은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는데 김 원장과 함께 수술하면서 자신감이 붙었다”고 말했다. 김 원장은 캄반 전문의에게 직접 메스를 맡기면서 옆에서 인공관절 전 단계, 뼈를 자르는 방법 등 수술 방법을 상세히 가르쳤다. 기자도 수술에 필요한 어시스트로 참여하면서 수술 과정을 도왔다.

라오스의 최고 어린이병원으로 손꼽히는 국립아동병원의 의사들도 한국 의료진을 반갑게 맞아줬다. 국립아동병원은 한국국제협력단(KOICA·코이카) 등이 지원해서 만든 이 나라 최초의 병원으로 로비엔 태극기와 라오스 국기가 나란히 놓여 있다. 이종욱-서울 프로젝트 위원장인 신희영 소아과 교수(66)는 한국에서 모금한 약 4500만 원으로 구입한 항암제를 라오스 소아백혈병 환자들을 위해 국립아동병원에 기증했다. 이 나라 아이들은 소아암에 걸리면 모두 죽음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2014년부터 현재까지 총 2억4000만 원을 모금해 구입한 항암제 지원으로 42명의 소중한 생명을 살려냈다.

임상뿐이 아니다. 한국의 의술은 라오스 국립의대에서도 빛났다. 라오스에서 유일하게 의사를 양성하는 곳으로 매년 120여 명의 의사가 배출된다. 이 학교에 이종욱-서울 프로젝트를 통해 기초의학 실험실 기자재 기증 및 사용 방법 등 기술도 전수했다. 최용 서울대병원 소아과 명예교수(77)는 기증한 기자재가 현장에서 제대로 사용되고 있는지, 전수받은 기술이 환자들에게 잘 활용되는지 꼼꼼히 체크하고 추가 지원 여부도 확인했다.

이처럼 라오스 보건의 밑바탕엔 이종욱 프로젝트가 든든한 힘이 되고 있다. 김 원장과 신 교수, 최 명예교수의 헌신과 봉사정신이 먼 타국에서 빛을 발한 것이다. 세 사람 모두 은퇴하거나 후학을 양성할 때이지만 라오스 보건을 위해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최 교수는 “라오스 의료 환경은 여러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10여 년간 한국의 지원으로 이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는 단계”라며 “앞으로 2차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라오스의 의료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등 한국의 의술과 보건정책이 잘 전수돼 많은 나라가 본받는 모델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의료진은 라오스에 뿌리내린 한국의 ‘의료 국력’을 위해서라도 추가 지원과 인력이 더욱 절실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진한 의학전문기자·의사 liked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