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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종 이후 한국 외상센터의 과제[오늘과 내일/이성호]

입력 | 2020-01-31 03:00:00

외상환자 치료의 공공성 감안해야
닥터헬기 지속 위한 의식전환 절실




이성호 정책사회부장

이국종 교수(51)를 처음 본 건 정확히 9년 전이다. 2011년 1월 30일 경기 수원시 아주대병원 강당이었다. 이 교수는 소말리아 ‘아덴만 여명’ 작전에서 크게 다친 삼호주얼리호 석해균 선장을 살리기 위해 밤샘수술을 진행했다. 이날 병원 강당에서는 석 선장 경과에 대한 첫 브리핑이 열렸다. 마이크는 유희석 당시 아주대병원장(현 아주대의료원장)이 잡았다. 이 교수는 연단 아래에 앉았다. 두 사람은 브리핑 중 수시로 의견을 나눴다.

두 사람은 설 연휴도 반납하고 석 선장 치료에 매달렸다. 덕분에 석 선장의 상태는 빠르게 호전됐다. 당시 현장을 취재하던 필자에게 이 교수와 유 원장의 모습은 꽤 보기 좋은 파트너로 비쳤다. 두 사람의 역할이 국내 중증외상환자 치료 시스템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였다.

기대에 살짝 금이 간 건 얼마 뒤였다. 그해 2월 13일 병원 내 작은 회의실에서 이 교수를 따로 만났다. 석 선장 치료를 맡고서 처음으로 이 교수가 언론과의 단독 인터뷰에 나섰다. 이 교수는 석 선장 치료 과정과 경과를 자세히 설명했다. 다소 피곤한 모습이었지만 눈빛은 지금처럼 날카로웠다. 그는 중증외상환자 치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국내 시스템의 문제점을 역설했다.

기사 마감을 위해 인터뷰를 마무리할 즈음, 이 교수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그는 질문에 없던 내용을 쏟아냈다. 요약하자면 자신과 외상외과를 둘러싼 병원 안팎의 불편한 시선이었다. 두툼한 자료까지 꺼내 놓으며 꽤 구체적인 이야기를 털어놨다. 그의 말을 수첩에 적었지만 당시 기사에는 제대로 담지 못했다. 관심이 집중된 석 선장 이야기가 먼저일 수밖에 없었다.

석 선장 퇴원 후 이 교수는 말 그대로 ‘영웅’이 됐다. 응급의료법 개정안(이국종법)을 통해 그가 꿈꿨던 중증외상센터가 전국에 설치됐다. 그 모습을 보며 마음 한편에 있던 빚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그가 “오만보다 못하다”고 혹평했던 한국의 외상환자 치료 시스템이 조금이나마 나아졌기 때문이다. 그 후 외상센터에 대한 문제가 이따금 불거질 때마다 있을 수 있는 갈등이라고 여겼다.

이달 18일 이 교수가 외상센터장 사의를 표명했다는 걸 듣고 9년 전 그날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그가 겪었을 마음고생의 시간을 알기에 결심을 바꾸기 어려울 것 같았다. 결국 이 교수는 29일 사표를 던졌다. 예고했던 날짜보다 5일이나 빨랐다. 사표가 수리되면 그는 평교수로 돌아간다. “외상센터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했으니 당분간 연구나 강의에 전념할 것으로 보인다.

외상센터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병원 측의 고충도 충분히 공감이 간다. 수익도 나지 않고, 응급의료 전문헬기(닥터헬기) 탓에 민원만 초래하는 외상센터 운영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도 현장을 지키면서 겪은 이 교수의 어려움과는 차이가 있어 보인다.

정부는 이국종 이후의 외상센터와 중증외상환자 치료 시스템에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의견이다. 물론 사람 한 명 빠졌다고 당장 시스템이 마비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전국 외상센터는 비슷한 고민을 갖고 있다. 제2의 이국종이 나올 수도 있다. 정부도 다시 진지하게 따져봐야 한다. 민간병원이 공공성의 무게를 모두 감당할 수 있을지 말이다. 닥터헬기의 부활도 걱정이다. 과연 어떤 의사와 병원이 쏟아지는 민원을 몸으로 막아낼지 의문이다. 그런데도 정부가 이 교수 퇴장의 배경을 ‘영웅 뒷바라지에 따른 갈등’이라는 감성적 코드로만 바라보는 것 같아 영 불편하다.

이성호 정책사회부장 stars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