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선거철의 표정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의 ‘부지발에서의 댄스’(1883년)와 펠릭스 발로통의 ‘왈츠’(1893년·오른쪽). 두 그림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지만 각기 당대를 반영하고 있다. 춤추는 이의 마음과 표정이 서로 다르듯, 선거를 치르는 국민의 심경도 제각각 다르고 복잡할 것이다.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가 1883년에 그린 ‘부지발에서의 댄스(Dance at Bougival)’에 나온 남자 바짓단과 여자 드레스 끝단을 비교해 보라. 역동성이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 남자 바짓단에 비해 여자의 드레스 끝단은 당시 울려 퍼졌을 음악의 템포를 반영한다. 10년 뒤 펠릭스 발로통이 그린 ‘왈츠(la valse)’를 보라. 속도감 있게 그려진 바짓단과 드레스 끝단은 당시 무도회에 빠른 템포의 왈츠가 울려 퍼졌음을 증명한다. 화면 가득한 성에는 사람들이 살얼음판이라는 패스트 트랙 위에서 춤을 추었음을 보여준다.
무도회를 찍는 사진기자나 화가는 춤추는 이들의 마음을 읽어 후대에 남겨야 한다. 사람들은 등장인물의 표정을 보며 과거를 기억하고 평가할 것이다. 부지발에서의 댄스에서 남성과 여성의 표정은 대조적이다. 몰입한 남자는 한껏 상대에게 밀착해서 자신을 마주 보아 달라고 애걸한다. 반면 당시 17세였던 상대 여성은 한사코 그 시선을 피해 땅에 떨어진 물건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다. 면도를 제대로 하지 않은 당신의 얼굴을 보면 흥이 깨질 것 같아요, 라고 말하는 듯.
이처럼 다르면서도 비슷한 세기말의 두 무도회 그림은 당대를 얼마나 잘 반영하는 것일까. 부지발에서의 댄스는 나머지 춤꾼들을 배제하고 오직 두 명의 남녀에게 집중한다. 반면 왈츠에서는 많은 사람이 떼 지어 함께 춤을 추기에 전체와 부분의 긴장이 명료하게 드러난다. 상대 남성의 얼굴을 화폭 밖으로 밀어버리고 유일하게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오른쪽 하단 여성은 이 무도회에서 예외적인 인물이었을까, 아니면 전형적인 인물이었을까.
이 질문은 음악이 끝나야 비로소 대답할 수 있다. 음악이 끝나면 춤추던 이들은 각자 제자리로 돌아가면서 그 나름의 표정을 지을 것이다. 마치 유세의 춤판이 끝나고 투표일이 되면 기표소에 들어가는 유권자들이 그 나름의 표정을 짓듯이.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하다가 결국 기표소까지 나온 공화정 시민들의 복잡한 표정. 유권자들의 그 표정이 정치권의 다음 춤판을 결정할 것이다. 마치 제자리로 돌아오는 댄서들의 표정이 무도회의 다음 음악을 결정하듯이.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