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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 있는 ‘꼰대’ 무능한 ‘좋은 사람’[광화문에서/이헌재]

입력 | 2020-02-06 03:00:00


이헌재 스포츠부 차장

프로야구 두산의 김태형 감독(53)은 2015년 지휘봉을 잡은 후 5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3번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그는 젊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꼰대’다.

몇 해 전 해외 전지훈련 출발 때 있었던 일이다. 입단한 지 몇 년 안 된 한 신참 선수가 머리를 노랗게 염색하고 인천국제공항에 나타났다. 김 감독은 담당 코치를 불러 조용히 말했다. “쟤, 그냥 그대로 집에 가라고 해.” 그 선수는 부랴부랴 공항 내 미용실을 찾아 머리를 다시 검은색으로 물들인 후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김 감독은 “멋 부리는 건 야구 잘하고 난 뒤 해도 늦지 않다”고 했다. 지난해엔 이런 일도 있었다. 경기 중 타석에 선 두산 선수가 상대 투수의 공에 등 부위를 맞고 쓰러져 골절상을 입었다. 그대로 그라운드로 뛰쳐나간 김 감독은 폭언을 쏟아냈다. 며칠 후 공식적으로 사과했지만 ‘꼰대’ 같은 행동이었다. 많은 지도자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소통’과도 거리가 멀다. 오히려 자기의 원칙과 기준을 밀어붙이는 스타일이다. 이 때문에 그라운드 위에서는 모든 선수와 코치들이 그를 무서워한다.

그런 그가 어떻게 대한민국 최고의 ‘명장(名將)’이 될 수 있었을까. 포수 박세혁(30)과 주장 오재원(35)의 사례가 이에 대한 해답이 될 것 같다. 10년 넘게 두산의 안방을 지키던 포수 양의지는 2018시즌 후 NC로 이적했다. 그 구멍은 박세혁으로 메워야 했다. 박세혁을 키우기 위해 김 감독은 ‘밀당’을 적절히 사용했다. 먼저 채찍. 작년 한 해 김 감독에게 가장 많이 혼난 선수는 박세혁이었다. 김 감독은 벤치를 쳐다보는 박세혁의 모습에서 자신감 유무를 한눈에 알아차렸다. 미적미적 사인을 내는 날에는 눈물이 쏙 빠지게 혼을 냈다. 그렇지만 대외적으로는 “세혁이가 잘하고 있다. 우리 팀 상승세의 일등공신은 박세혁”이라고 힘을 실어줬다. 만년 백업이던 박세혁은 그렇게 상대와 부딪치며, 타자에게 맞아가며 국가대표 포수로 성장했다.

내야수 오재원도 마찬가지다.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 오재원은 지난해 부진으로 2군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언젠가 기회가 있을 테니 잘 준비하라”고 타일러 놓았다. 아니나 다를까 오재원은 키움과의 한국시리즈에서 5할 타율(10타수 5안타)로 펄펄 날았다. 오재원은 시즌 후 자유계약선수(FA)가 됐지만 적지 않은 나이 등으로 좋은 대우를 받기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김 감독은 계약도 하지 않은 오재원을 “다음 시즌 우리 팀 주장”이라고 치켜세웠다. 두산은 오재원에게 3년 최대 19억 원의 후한 계약을 안겼다.

선수 개개인의 장단점에 대한 면밀한 파악과 돌아가는 판세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으면 이런 ‘밀당’이 나오기 힘들다. 최근 김 감독은 또 하나의 승부수를 던졌다. LG와 작별한 베테랑 포수 정상호(38)를 영입한 것. 명목상은 전력 보강이지만 사실은 주전 첫해 모든 것을 이룬 박세혁이 자칫 느슨해지는 것을 막기 위한 견제구였다. 많은 감독들이 “나는 선수들을 믿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믿음의 야구’를 내세운 이들 중 좋은 성적을 낸 사람은 드물다. 반면 김 감독은 “내가 믿을 수 있도록 선수들이 먼저 보여줘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유능한 꼰대와 무능한 좋은 사람. 둘 중 누가 더 나은 사람일까.
 
이헌재 스포츠부 차장 u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