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현장을 가다] 美 거주 한인 1.5세대와 2세대, 주류 사회로 속속 진입 밀레니얼 세대는 한류의 첨병… 정치적 위상 강화는 과제
지난해 10월 5일 ‘세계 한인의 날’을 기념해 뉴욕 맨해튼 32번가 코리아타운 근처에서 진행된 ‘코리안 퍼레이드’에서 취타대가 행렬을 이끌고 지나가고 있다. 뉴욕한인회 제공
박용 뉴욕 특파원
찰스 윤 뉴욕한인회장(57·변호사)은 개회사에서 “오늘 참석자의 60% 이상이 이민 1세대의 자녀인 1.5세대(16세 이전 미국 이민)와 2세대(미국 출생)다. 1세대와 젊은 세대가 함께하는 한인회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신영주 뉴욕한인회 본부장은 “올해 행사의 참석자와 모금액이 한 해 전보다 50%씩 늘었다. 한 참석자는 회사 이름으로 무려 2만5000달러(약 3000만 원)를 기부했다”고 말했다. 노·장년층이 주도했던 뉴욕한인회에 대대적인 세대교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 ‘꼰대 단체’ 이미지 벗고 변화 시도
이 중 20대 여성 부회장도 있다. 한인회 홍보를 맡고 있는 애리 김 뉴욕한인회 부회장(24)은 “한인회가 아직 ‘어른들의 단체’란 인식이 강하다. 더 포용적이고 더 많은 다양성을 지닌 단체로 만들고 싶어 참여했다”고 설명했다.
뉴욕대 대학원생인 김 부회장은 한인회 소셜미디어를 운영한다. 한인회 영문 뉴스레터를 만들고 한국어에 서툰 청년 한인들을 껴안기 위해 2세들을 위한 한국어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한인회 스마트폰 앱을 영어로 쓸 수 있게 하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 말 뉴욕 퀸스의 퀸스한인회에서도 세대교체가 일어났다. 열 살에 이민을 온 존 안 씨(41)가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도 취임사에서 “1.5세와 2세들의 참여를 더 늘려 ‘젊은 한인회’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뉴욕 한인 사회는 젊어진 한인회에 거는 기대가 크다. 2015년 4월 뉴욕타임스(NYT)는 1개 면을 털어 당시 가치가 약 1500만 달러였던 첼시 소재 뉴욕한인회관의 처리 문제로 빚어진 한인회 내분과 한인회장 탄핵 사태를 조명했다. NYT는 “뉴욕 지역 한인회장들은 한국 정부 고위 관계자가 뉴욕을 방문할 때 그들을 호스트하는 역할을 한다. 또 자신의 직위를 한국에서 국회의원을 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았다”고 꼬집었다. 이민 1세대인 K 씨(62)는 “한인회 내분과 갈등이 NYT에 대서특필된 후 한인 사회가 큰 충격을 받았다. 젊은 세대들이 한인회를 ‘꼰대 단체’로 여기고 멀어진 결정적 계기”라고 했다.
미국 정부는 1965년 국적에 상관없이 평등한 이민 기회를 부여하는 새 이민법을 시행했다. 이후 한인들의 대규모 이민이 시작됐다. 1980년대에는 한 해 약 3만 명씩 이주하면서 미주 한인 사회가 급격히 팽창했다.
이후 한국 경제가 성장하면서 연간 이민자 수는 2만 명대로 떨어졌다. 이민자 수가 줄고 한인 사회의 고령화가 시작되면서 1세대 비중이 줄고 1.5세대와 2세대 비중이 증가하고 있다. 재외한인사회연구소에 따르면 현재 한국계 이민자 중 이민 1세대 비중은 약 48%다.
이들의 직업 및 소득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1세대는 음식점, 건강관리, 교육, 세탁업 등에 주로 종사했다. 이들의 자녀인 2세대는 미국식 교육을 받고 컨설턴트, 의사, 변호사 등으로 일한다. 퓨리서치에 따르면 미국에서 태어난 25세 이상 한인의 대학 졸업자 비중은 85%로 1세대(72%)보다 높다. 2세대의 빈곤율은 10.5%로 1세대(14.2%)보다 낮다. 2세대의 가구당 소득 중간값은 6만8900달러로 1세대(5만7000달러)를 훨씬 웃돌고 있다.
2018년 미슐랭가이드에서 별 1개를 받은 맨해튼의 유명 식당 ‘꽃(COTE)’의 대표는 한인 1.5세 사이먼 김(김시준·37)이다. 그는 라스베이거스의 호텔학교를 졸업하고 뉴욕으로 돌아와 ‘코리안 스테이크’란 새 장르를 개척했다. 과거 그의 부모도 뉴욕에서 음식점을 운영했다. 김 사장은 “어린 시절 어머니는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난 음식을 날랐다. 일식당 ‘노부’처럼 세계에서 알아주는 한식 브랜드 기업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올가을 남부 플로리다에도 매장을 열 계획이다.
특히 한인 밀레니얼 세대(1980∼2000년대 초반 출생자)는 과거 세대보다 한국에 대한 자부심과 애착이 크다. 민병갑 뉴욕시립대 퀸스칼리지 석좌교수는 “1960, 1970년대 미국에서 태어난 한인에 비해 1980, 1990년대 태어난 한인들이 한국 문화에 애착이 크고 한국계란 정체성도 뚜렷하다. 한국의 경제력과 영향력이 커지고 미국 사회의 인종적 거부감이 줄어든 영향일 수 있다”고 진단했다.
젊은 한인들은 한국 기업의 미국 진출 및 한류 전파의 첨병으로 활약하고 있다. 박동욱 KOTRA 뉴욕 부관장은 “젊은 한인이 세운 스타트업들은 한국의 5세대(5G) 이동통신, 정보기술(IT) 산업의 기술력을 미국 현지 콘텐츠와 결합하는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뉴욕에 거주하는 고종 황제의 손녀이자 의친왕의 딸인 이혜경 여사는 “한인회가 1960년대 초창기에 비해 점점 탄탄해지고 커지는 것 같다. 젊은이들이 한인 사회에 관심을 갖는 게 무엇보다 기쁘다”고 말했다.
○ 정치력 향상 등 과제도 남아
지난달 13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열린 제60주년 ‘뉴욕 한인의 밤’ 행사. 뉴욕한인회 제공
한국계 이민자보다 이민 역사가 수십 년 앞선 일본계 이민자들은 2, 3세대 인구 비중이 높다. 또 하와이, 캘리포니아 등 아시아계 인구가 많은 주에 주로 거주해 오래전부터 의회에 진출했다. 김 의원은 “더 많은 한국계가 미 정계에 진출해야 한다”며 “정치와 외교에 관심이 있는 한인 청년들의 멘토가 되고 싶다”고 강조한다.
한미 관계 증진을 위한 비영리단체 코리아소사이어티의 캐슬린 스티븐스 이사장 겸 전 주한 미국대사는 “한미 관계에서도 한국계 이민 2세대들의 역할이 중요하다”며 “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기회와 정보를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젊은 한인들이 미국 주류 사회에 진입하는 비중이 늘면서 타인종과의 결혼도 잦아지고 있다. 이에 따른 민족성 소멸 및 쇠퇴 우려도 제기된다. 민병갑 교수는 “이민자 수가 줄고 타 인종 간 결혼이 늘고 있는 한국계는 미국에서 민족성 소멸 위험이 높은 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배척받는 이민자에서 미국 사회의 주류로 성장한 유대계는 대대적인 투자 및 자체 통계 작성 등을 통해 자신들의 박해 역사를 널리 알렸다. 특히 출신국에 상관없이 유대계 핏줄이 조금이라도 섞여 있으면 이들을 적극 포용해 민족성을 유지해왔다”며 한인 사회가 이를 참고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를 바탕으로 최근 미국에서 자란 약 12만 명의 한인 입양인 등 다양한 한국계 미국인을 껴안으려는 노력도 뒤따르고 있다. 입양 후 부모의 이혼, 신청 누락 등으로 시민권을 취득하지 못한 한인 입양인은 약 1만8000명. 김동석 미주한인유권자연대(KAGC) 대표는 “한인 사회가 이들 입양인을 포용해야 한다. 미 의회에 ‘시민권이 없는 입양인 문제는 인권 문제’라는 점을 적극 알리고 제도 개선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용 뉴욕 특파원 par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