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도쿄 올림픽 아시아 예선을 앞두고 충북 진천선수촌에서 훈련하고 있는 여자 복싱 대표팀 최고참 오연지(왼쪽)와 발라드 가수 출신 정주형. 둘은 한국 최초의 여자 복싱 올림픽 본선 진출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대한복싱협회 제공
이원홍 스포츠전문기자
그러나 그는 지금 여자 복싱 국가대표 정주형(29)이다. 정주형은 지난해 12월 21일 대한복싱협회가 주최한 2020 도쿄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 최종전 51kg급에서 기존 대표 선수들을 물리치고 우승했다. 한국 나이로 올해 서른. 선수로는 적지 않은 나이에 찾아온 운명의 급격한 전환이다.
가수 시절 오랫동안 히트곡이 없자 주변에서는 데리고 있으면 적자라는 말이 들려왔다. “수입은 불안정했고 생활은 어려웠다”고 했다. 소속사를 나왔고 작업실로 쓰던 방에서 먹고 잤다. 그곳에서 대학입시 준비생들에게 노래를 가르치며 살았다.
하지만 인생의 진로를 바꾸는 것이 그리 쉬웠을까. “엄청 무섭고 너무 힘들었다”고 했다. 지금도 여전히 주먹이 무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그를 움직였을까. 그는 “지금 당장은 이것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고 했다. 선수가 되어 소속팀이 생기면 고정적인 수입이 생길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쳤고 “맘먹고 해보자”고 다짐했다. 지난해 5월, 운동 도중 오른 발목이 돌아갔다. “복싱은 스텝”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발목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는 부어 오른 아픈 발목을 끌고 링에 올랐다. 그 발목으로 지난해 11월 예선을 1위로 통과했고 12월 최종 선발전에서 내로라하는 선수들을 물리치고 우승했다. “내가 감히 어떻게 국가대표가 됐을까 얼떨떨하다”고 했다.
이제 그는 당당한 국가대표 선수다. 다음 달 3일 요르단서 열리는 아시아 예선에서 6위 안에 들면 한국 여자 복싱 최초로 올림픽 본선에 나선다. 한국은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여자 복싱이 도입된 후 한 번도 본선에 진출한 적이 없다. 우연에 가까운 시작이었지만 역사에 기록될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최희국 대한복싱협회 사무처장은 드라마틱하게 등장한 정주형에 대해 “무언가가 있다”고 했다. 그 ‘무언가’에 대해 묻자 “절실함이 아니겠느냐”고 했다.
하지만 그것뿐일까. 이번 올림픽을 절실하게 기다려온 선수 중 한 명이 복싱 여자대표팀 최고참 오연지(30·울산광역시청·60kg 이하급)다. 한국 최강자지만 지난 두 번의 올림픽 출전 기회를 놓쳤다. 그는 “올림픽은 하늘이 정해 주는 거 같다”고 했다.
일반인들에게도 마찬가지겠지만 선수들을 크게 괴롭히는 것 중 하나가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는 불확실성이다. 여기서 오는 막연한 불안감은 때로 공포가 되고 몸을 굳게 만드는 사슬이 된다. 선수들은 이것과도 싸우고 있다.
정주형은 “1라운드에 대한 공포가 있다”고 했다. 시작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러나 일단 부딪치면 두려움은 점차 사라져 간다고 했다. 오연지는 “너무 간절해지면 부담이 된다”고 했다. 시작 전의 불안, 이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었다.
절실함과 더불어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이들의 얘기를 듣다 보면 경기 결과로만 뭔가를 평가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안팎과 용기 있게 맞서 온 그들은 이미 영웅이다.
이원홍 스포츠전문기자 blues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