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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 동아일보 기고 통해 독립운동 참여 독려

입력 | 2020-02-08 03:00:00

[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1925년 ‘국내동포에게 드림’ 글
4회까지 게재 예정이었지만 日帝총독부 검열로 제목만 실려
임정 초기 기반 닦는데 큰 기여




동아일보 1925년 1월 23일자 1면에 실린 안창호의 기고문 ‘국내동포에게 드림’.

임시정부를 대표하는 주요 인사 가운데 도산 안창호(1878∼1938)를 빼놓을 수 없다. 일찌감치 신학문의 필요성을 깨닫고 1902년 미국에서 유학했던 그는 1909년 발생한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연루된 혐의로 3개월의 옥고를 치른 뒤 1911년 미국으로 망명한다.

미국에서도 독립운동의 노력을 이어가던 안창호는 임시정부 출범(1919년 4월 13일) 직후인 1919년 5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간다. 그는 임시정부 초기 뛰어난 조직 운영 능력을 앞세워 내무총장과 국무총리 대리 등을 역임하며 임시정부의 기반을 닦는 데 크게 기여한다. 하지만 1921년 임시정부가 내부 분열을 일으키자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

이후에도 그는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았고 일제에 눈엣가시 같은 존재로 낙인찍힌다. 결국 1932년 일어난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공원 폭탄 사건에 연루돼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고, 2년 6개월을 복역한다. 동우회 사건으로 재투옥된 뒤 병을 얻어 1938년 사망한다.

그의 조국 독립에 대한 열망을 확인할 수 있는 글이 동아일보에 실리기도 했다. 그가 ‘국내동포에게 드림-동아일보를 통하여’라는 제목으로 1925년 1월 23일부터 25일까지 3회에 걸쳐 기고한 것이다. 그는 글에서 “오늘 조선 사회에 주인 되는 이가 얼마나 됩니까. 주인 된 자는 자기 집안일이 어려운 경우에 빠질수록 그 집에 대한 염려가 더욱 깊어져서 그 어려운 경우에서 건져낼 방침을 세우고야 맙니다. 자기 민족사회가 어떤 비운에 처하였든지 그 민족을 건져낼 구체적인 방법과 계획을 세우고 그 방침과 계획대로 자기의 몸이 죽는 데까지 노력하는 자가 그 민족 사회의 책임을 중히 알고 일하는 주인이외다”라며 일반인들의 독립운동 참여를 독려했다. 당초 이 글은 4회까지 게재될 예정이었으나 조선총독부가 검열을 통해 전문 삭제 결정을 내리는 바람에 제목만 실리고 만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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