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종 떠난후 권역외상센터 앞길
위은지 기자
5일 경기 수원시 아주대병원에 휴가 후 첫 출근을 한 이국종 교수(외상외과)는 취재진들에 이렇게 설명했다. 지난달 29일 이 교수가 제출한 경기남부권역외상센터장 보직사임원은 4일 수리됐다. 아주대 권역외상센터 관계자는 “센터장 명패가 사라진 연구실을 보면 마음이 착잡하다”며 “의료진의 동요도 큰 상황”이라고 말했다. 9일 현재까지 이 교수의 후임자는 정해지지 않았다.
이 교수는 2011년 소말리아 ‘아덴만 여명’ 작전에서 크게 다친 삼호주얼리호 석해균 선장을 살려내면서 중증외상환자 치료의 전문가로 주목받았다. 그가 권역외상센터의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역설해 국민들의 관심과 정부 지원을 이끌어 냈다. 지금 전국 곳곳에 권역외상센터가 설립된 배경에는 이 교수의 역할이 컸다. 그런 이 교수가 지난해 12월 2일 이후 한 달 넘게 권역외상센터장 자리를 비웠다. 해군이 태평양에서 실시한 해상훈련에 참가한 것이다.
○ 갈등의 불씨는 인력-병상 부족
이 교수는 사임 결정의 이유로 간호인력 충원과 병상 부족을 꼽았다. 앞서 이 교수는 지난해 10월 경기도 국정감사에 참고인으로 출석해 “국회에서 배정한 외상센터 간호인력 증원 예산의 절반이 병원 내 기존 간호인력 인건비에 사용됐다”고 비판했다.
2018년 보건복지부는 아주대 권역외상센터 중환자실 간호인력 증원을 위해 약 22억 원을 지원했다. 이 교수는 간호인력 67명을 늘려 달라고 요청했으나 병원은 36명만 충원했다. 아주대병원은 “정부 기준을 초과해 고용하던 간호사 인건비를 자비로 부담하고 있었다. 예산 일부를 이들의 인건비로 쓴 것”이라고 설명했다. 복지부도 아주대병원의 이 같은 결정에 법적인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이 교수는 또 권역외상센터 병상이 부족해 어쩔 수 없이 ‘환자 수용 불가’(바이패스)를 결정했다고 주장했다. 본원에 비어 있는 병상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는 것. 병원 측에서 원무과에 지침을 내려 외상센터 의료진이 주치의인 환자는 본원 병실을 사용할 수 없게 했다는 것이다. 아주대 권역외상센터의 병상이 부족해 환자를 받지 못한 시간은 2018년 719시간(29일 23시간), 지난해 868시간(36일 4시간)이다.
이 같은 의혹에 경기도는 5일부터 아주대병원에서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기간은 당초 7일까지에서 10일까지로 연장됐다. 조사 내용은 아주대병원의 방해로 외상센터 바이패스가 발생했는지, 당시 응급환자 진료를 거부했는지 등이다. 경기도는 조사 결과에 따라 관계자에게 책임을 물을 예정이다.
지난해 8월 31일 출범한 7번째 응급의료전용헬기(닥터헬기)도 하늘을 날지 못하고 있다. 닥터헬기는 지난해 11월까지 정상적으로 운항하다가 독도 헬기 추락 사고를 계기로 점검에 들어갔다. 지난달 점검 결과 이상이 없다는 것이 확인됐지만 의료진이 탑승을 거부하면서 실제 운항이 재개되지 못하고 있다. 현재 닥터헬기는 경기 수원시 제10전투비행단 계류장에 멈춰 서 있다.
지난해 12월 권역외상센터 측은 인력 부족, 병상 부족, 안전 문제 등을 들어 닥터헬기에 의료진이 탑승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병원에 통보했다. 이 교수는 5일 “닥터헬기 운항에 필요한 인원은 5명인데 실제로는 1명만 탑승해 왔다”며 “병원에서 나머지 인원은 국·도비를 지원받을 경우 채용이 가능하다는 조건을 달았다. 결국 돈을 따오라는 뜻”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간호사가 유산하고 힘들어해도 돈을 따오라고 했는데 이제 더는 못 하겠다”고 한숨을 쉬었다.
복지부는 경기도와 병원 측에 이달 20일까지 닥터헬기 운항을 재개하라고 통보했다. 복지부는 양측이 운항을 재개할 의사가 없다면 헬기 회수 등의 조치가 불가피하다는 의견이다. 병원 측은 당초 2021년까지 단계적으로 채용하기로 했던 헬기 운영인력 13명을 올해 일괄 채용하겠다는 내용의 계획서를 지난달 31일 경기도에 제출했다. 그러나 경기도는 아주대병원에 5일 공문을 보내 즉시 운항을 재개하라고 통보했다.
이 교수와 병원 측 사이에 갈등이 불거졌지만 복지부는 “제도상 아무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반복했다. 박능후 복지부 장관은 지난달 20일 기자들과 만나 “양쪽이 다 열심히 했는데 지쳐 있는 상황이다. 법이나 제도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박 장관은 17일에도 “아주대 권역외상센터에 대해 소상히 파악하고 있다”며 “(권역외상센터에 대해) 제도적으로나 법적, 행정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상 다하고 있다”고 선을 그었다.
장관이 이같이 호언했지만 양측 갈등의 빌미는 결국 복지부가 제공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김윤 서울대 의료관리학과 교수는 “누가 센터장이나 병원장 자리에 오더라도 병상 문제 같은 갈등이 최소화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었어야 했다”며 “결국 1차 책임은 정교한 관리체계를 만들지 않은 복지부에 있다”고 지적했다.
○ 센터별 맞춤전략 필요
의료계에서는 많은 권역외상센터가 ‘중증외상환자를 골든아워 내에 치료한다’는 목적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번 논란을 계기로 권역외상센터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정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 이유다. 김 교수는 “정부가 인건비 등 지원금을 늘려와 센터 운영으로 적자가 생기진 않을 것”이라면서도 “중증외상환자 치료 수가가 낮다 보니 아주대나 부산대 정도를 제외하고는 중증외상환자를 적극적으로 보려 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9일 복지부에 따르면 2018년 기준 전국 13개 권역외상센터에 입원한 환자 3만3275명 중 46.7%(1만5543명)가 경증외상환자였다. 국제 외상 평가기준인 손상중증점수(ISS)에 따라 흉부, 복부 등 6개 신체부위별 손상 정도를 합산해 75점 만점에 9점 미만이면 경증, 9점 이상 15점 미만은 중증 의심, 15점 초과면 중증으로 분류한다.
김 교수는 “경증외상환자가 전체의 20∼30% 정도를 차지하는 게 바람직하다”며 “여기에 해당하는 곳은 부산대병원과 아주대병원 권역외상센터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경증외상환자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은 목포한국병원 권역외상센터(65%)였다. 안동병원(58%), 의정부성모병원(54%), 가천대길병원(51%) 등도 전체 환자의 절반 이상이 경증이었다.
권역외상센터는 평균적으로 센터가 위치한 권역 내에서 발생한 중증외상환자의 28%만 치료하고 있었다. 권역 내에서 발생한 중증외상환자 진료율이 가장 높은 병원은 울산대병원(47%) 충북대병원(47%) 의정부성모병원(42%) 순이었다. 반면 가천대길병원(12%) 단국대병원(16%) 을지대병원(17%)은 권역 내에서 발생한 중증외상환자 진료율이 낮았다. 가천대길병원이 위치한 인천 권역에서 발생한 중증외상환자의 88%가 인천 내 다른 병원이나 타 권역의 권역외상센터에서 진료를 받았다는 의미다.
아주대병원, 부산대병원 등 중증외상환자를 많이 진료하지만 정작 권역 내 중증외상환자를 많이 소화하지 못하는 곳은 센터 규모를 더 키울 필요가 있다. 울산대병원, 충북대병원, 의정부성모병원처럼 권역 발생 중증외상환자 진료율이 50%에 가까운 곳은 경증외상환자 진료를 줄여야 한다. 경증외상환자 비율은 높은데 권역 발생 중증외상환자 진료율이 낮은 병원은 중증외상환자를 더욱 적극적으로 돌볼 수 있게 이끌어야 한다. 김 교수는 “궁극적으로 경증환자 비율을 낮추고 각 권역에서 발생한 중증환자 진료율을 높이는 방향으로 시스템을 정비해야 권역외상센터가 본연의 목적에 맞게 운영될 수 있다”고 말했다.
위은지 기자 wiz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