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 노멀’ 되어버린 북-미 교착… 현실부정 ‘정신승리’ 외교 안 돼
이승헌 정치부장
4일(현지 시간) 밤 미국 워싱턴 의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연두교서 어디에서도 북한이나 한반도는 나오지 않았다. 연두교서는 보통 국내 이슈에 집중하는 데다 특히 11월 대선이 있는 만큼 북핵은 살짝만 언급할 줄 예상했는데, 아예 원고에서 빠진 것이다. 김정은이 지난해 말 당 회의에서 ‘충격적 행동’에 나서겠다고 했는데도 말이다. 2018년, 2019년 연두교서에서 연달아 북핵을 자신의 핵심 외교 치적으로 삼으려 했던 트럼프다. 왜 그랬을까. 8일 미 행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미국의소리(VOA) 대담 프로그램을 우연히 보고 그 속내를 확인할 수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왜 북한을 언급하지 않았을까.(진행자)
―북한도 이렇게 예상했을까.(진행자)
“언급이 되지 않아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비핵화 대화는 미 대선이 끝나고 새 대통령이 취임한 뒤인 2021년 봄에나 재개되지 않을까 싶다.(스콧 스나이더·미 외교협회 선임연구원)
미 행정부가 돈을 대는 매체에서, 그것도 외교가에서 이름이 꽤 알려진 사람들의 말이 고스란히 방송됐으니 백악관의 속내는 이보다 더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지난해 말만 해도 2020년 상반기 중 3차 북-미 정상회담 추진설이 한미 외교가에 나돌던 상황과는 분위기가 거의 180도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전염병은 북-미 비핵화 대화 재개 가능성을 더욱 줄이고 있다. 지난해 말 ‘정면돌파전’을 선언하며 핵 개발과 자력갱생을 강조한 김정은으로서는 갑작스러운 전염병 사태로 당분간 집안 단속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북한은 대외 무역의 90%가량을 중국에 의존하고 있는데, 신종 코로나로 교역은커녕 북-중 국경을 폐쇄하기 급급한 상황. 한국은 지난해부터 계속 무시해 온 데다 이번엔 개성 연락사무소까지 잠정 폐쇄했다.
문 대통령이 트럼프의 연두교서 이후 올해 북핵 문제에 대한 스탠스를 바꿀지, 그대로 유지할지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신종 코로나가 잠잠해지기 전까지는 당장 밝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진정되더라도 크게 달라질 건 없어 보인다. 북-미 정상의 시그널과 우리의 4월 총선, 이미 시작돼 11월까지 내달릴 미 대선이라는 정치 일정까지 고려한다면 북핵은 당분간 노딜 상태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게 합리적 관측이다. 문 대통령은 인정하기 싫겠지만 북핵 대화의 교착 상태가 뉴 노멀(New Normal) 비슷하게 되어 버린 게 현실이다.
여권 일각에선 총선을 앞두고 어떤 식으로든 비핵화 대화가 재개되기를 바랄 것이다. 10일 새해 들어 처음 열린 한미 워킹그룹 회의에서도 우리는 미국 측에 대북 개별 관광은 인도주의적 차원인 만큼 다시 한 번 협조를 당부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사자들이나 주변 여건이 도저히 아니라고 하는데 우리만 집착하듯 비핵화 대화를 외치는 건 공허하다. 국제사회에선 이런 청와대의 판단력을 의심할 수도 있다. 물론 교착 상황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면 잠시 멈출 줄 아는(知止)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