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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과 놀자!/클릭! 재밌는 역사]5대째 화맥 잇는 ‘호남 산수화의 산실’ 운림산방을 아시나요?

입력 | 2020-02-12 03:00:00

‘남종화 대가’ 소치 허련의 작품세계




허련이 말년에 초가집을 짓고 그림을 그렸던 곳. 허건은 다른 사람에게 팔렸던 운림산방을 다시 매입해 지금의 모습으로 만든 뒤 국가에 헌납했다.작은 사진은 허련의 선면산수도(부채를 만드는 종이에 물감을 엷게 써서 그린 그림, 1866년,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운림산방과 점철산의 모습을 그렸다. 그림에 쓰인 글씨는 추사체이며, 그림을 글로 설명하고 있다. 이환병 제공

18세기는 조선시대 문화의 전성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실학의 성장, 한글 소설과 판소리의 발전 등과 더불어 그림 분야의 발전이 두드러진 시대였습니다. 정선의 진경산수화, 김홍도와 신윤복의 풍속화, 민화의 유행 등이 바로 떠오르죠.

반면 19세기는 경제와 문화가 쇠퇴하고 서양의 침략이 본격화된 ‘위기의 시대’로 인식됩니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서는 ‘19세기 위기론’이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19세기 그림 분야에서는 18세기와 견줄 만한 인물로 김정희, 허련, 장승업 등이 있습니다. 오늘은 19세기 남종화(양반 지식인들이 자신의 정신세계를 그림으로 표현)를 발전시킨 소치 허련(1808∼1893)과 그의 작품세계가 5대째 가업을 통해 계승되는 과정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 무명 화가에서 조선 최고의 화가로


허련은 전남 진도 출신의 무명 화가였습니다. 19세기에는 권력과 문화가 서울에 집중돼 있었고, 진도는 특히 유배객이 많아 다른 지역보다 더 차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진도 출신의 무명 화가가 19세기 문인 산수화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을까요.

허련은 그림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으나 체계적인 그림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28세 때에 초의선사의 소개로 윤두서의 후손 윤종민을 만나게 됩니다. 허련은 윤두서의 그림첩인 ‘공재화첩’을 빌려 초의선사가 사는 해남 대흥사로 가져옵니다. 허련은 대흥사에서 공재화첩을 보고 그림 공부에 정진했고, 초의선사는 다시 허련의 그림을 서울에 사는 김정희에게 소개합니다. 이 그림을 본 김정희는 허련의 재능을 알아보고 서울로 올라오게 합니다. 이때 허련의 나이 32세였습니다. 허련은 김정희 및 그의 제자들과 교류하며 시와 서예 수업을 집중적으로 받을 수 있었습니다.

허련은 뛰어난 그림 솜씨에 시와 서예를 겸비하게 되면서 조선 화단에서 주목받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당대 고관 신관호, 영의정을 지낸 권돈인, 정약용의 큰아들 정학연, 안동 김씨를 대표하는 김흥근 등과도 친분을 쌓았습니다. 40세를 전후해서는 여러 차례 헌종 앞에서 그림을 그려 바쳤습니다.

허련의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김정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허련은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를 가 있는 동안 세 차례 방문해 약 1년간 함께 생활했습니다. 김정희의 제자라고 할 수도 있고, 김정희가 발전시키지 못한 그림 세계를 완성한 인물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김정희는 서예의 세계에서, 허련은 산수화의 세계에서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허련은 여러 지역을 이동하면서 산수화, 사군자화, 모란화 등을 주로 그렸습니다. 방랑 생활 중 그림을 그려주고 받은 돈으로 생활했습니다. 허련은 김정희가 죽은 뒤 고향 진도에 내려와 운림산방이라고 부르는 초가를 짓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진도에 내려온 이후에도 끊임없이 서울을 찾아 흥선대원군, 민영익 등을 만났습니다. 허련은 아마 자신이 출세한 이유가 중앙의 사대부와 연결됐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 호남 산수화의 원조가 되다


허련은 한곳에 머물며 제자를 키우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호남지역의 그림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의 그림이 자손을 통해 가업으로 계승되었기 때문입니다. 허련의 뒤를 이어 그림을 배우던 맏아들 허은이 일찍 죽자 넷째 아들 허형이 그림에 몰두하였습니다. 허형은 늦은 나이에 화가의 길로 들어섰지만 아버지의 그림을 잘 모방하고 전수했습니다. 특히 모란과 매화 그림은 아버지의 그림을 능가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는 슬하에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그 가운데 넷째 허건과 다섯째 허림이 가업을 이었습니다. 또 같은 집안의 허백련에게 그림의 기초를 가르쳤습니다. 이후 허건은 전남 목포 지역, 허백련은 광주 지역에서 그림을 그리고 제자를 양성해 호남을 예술의 본고장으로 만들었습니다.

허건은 아버지의 반대로 그림 공부를 늦게 시작했다고 합니다. 가문의 후광과 자신의 노력을 바탕으로 1930년 이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무려 14차례 상을 받았습니다. 보통 허형은 허련의 작품을 모방하고 계승한 인물로, 허건은 가문의 작품세계를 충실히 계승하면서도 현대화의 기법을 도입해 새로운 그림 세계를 개척한 인물로 평가됩니다.

허건의 그림 경향은 광복 전후가 뚜렷이 구별됩니다. 광복 전에는 허련과 허형의 그림을 모방하다가 점차 일본 그림의 영향을 받아 채색 표현과 장식적 화면 구성이 두드러집니다. 광복 후에는 자연주의적 화풍을 시도하다 현대화의 기법을 도입해 화면 구성을 단순화하는 시기로 넘어갔습니다. 1950년대 이후에는 가문의 화풍을 중시하면서도 현대적이고 개성 넘치는 그림 세계를 구축했다고 평가받습니다. 허건은 제자를 많이 양성해 호남을 ‘예향’으로 만드는 일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고, 1980년대에는 운림산방을 복원해 국가에 헌납했습니다.

허건에게는 동생 허림이 있었습니다. 그는 일본 유학 중 사물을 점으로 표현하는 ‘토점화’라는 독창적인 화법을 발전시켜 일본 화단에서 주목을 받았으나 요절하였습니다. 현재 허림의 아들 허문과 허건의 손자 허진이 가업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허련의 그림은 허형, 허건, 허림, 허백련, 허문, 허진, 허재, 허준 등 가족들을 통해 계승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허련부터 시작한 ‘운림산방 화맥’은 5대를 이어오고 있으며, 이런 일은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환병 서울 용산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