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 사태 뒤 헌혈자가 급감하면서 혈액 보유량에 빨간불이 켜졌다.
강승현 사회부 기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신종 코로나) 여파로 줄어든 헌혈이 결국 혈액 공급 위기를 불러왔다. 주무 부처 보건복지부와 혈액 업무를 담당하는 대한적십자사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는 말만으론 그 심각함을 다 표현할 수 없는 듯 보였다. 각계에 동참을 호소하고, 신종 코로나 사태 직후 헌혈을 취소했던 단체들에 재고를 읍소했다. 헌혈하면 주는 사은품도 한시적으로 늘렸다. 적십자사 회장은 애절한 대국민 호소문도 내놓았다.
한국인들은 위기에 강했다. 2일분대로 떨어졌던 혈액 보유량은 최근 가까스로 3일분대를 회복했다. 헌혈자가 다시 늘어났기 때문이다. 공공기관이나 정·재계가 참여한 공도 컸지만, 역시 전국의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이 나서준 덕분이다. 타인의 생명을 위해 기꺼이 팔을 내준 이들의 참여는 어떤 찬사를 보내도 아깝지 않다.
사실 우리나라의 인구 대비 헌혈 참여율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평균 5∼6% 수준으로 대다수 선진국(2%대)과 비교하면 놀라울 정도다. 문제는 ‘지나친 혈액 사용’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한국은 공급에 비해 수요가 지나치게 많다. 이번 사태로 보유량은 그렇게 줄어들건만 혈액 사용량은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다. 이는 메르스나 사스 때도 마찬가지였다.
쉽게 말해, 비상 상황인데도 의료 현장은 평소와 똑같이 혈액을 가져다 썼단 얘기다. 물론 꼭 필요한 곳에 쓰는 걸 탓할 순 없다. 하지만 의료기관과 상시 소통하며 혈액 수급을 조절하는 전문기관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정부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을 게다. 현재로선 국가적 재난 상황이 닥쳐도 의료기관의 혈액 사용을 강제 제어할 근거가 딱히 없다. 가까스로 국회 상임위원회를 통과했던 ‘국가혈액관리정책원 설립 법안’은 여전히 법제사법위원회에 발이 묶여 있다. 혈액 보유량이 위기로 떨어졌는데 정부나 관계기관이 내놓을 수 있는 대책이 대국민 호소와 사은품뿐이라면 너무 허망하지 않은가.
매혈과 혈액 수입이 금지된 한국은 오직 헌혈로만 피를 얻을 수 있다. 헌혈 참여는 개인의 선택이지만 곧 국민 생명과 직결된다. 지금처럼 체계적인 시스템 없이 국민의 자발적 참여에만 기대선 안 된다.
마침 정세균 국무총리가 12일 혈액 공급 위기를 언급하며 ‘혈액수급 관리 대책 마련’을 지시했다고 한다. 혈액 보유량을 제대로 관리할 시스템이 없다면 위기는 언제든 찾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신종 코로나 사태로 드러난 국내 혈액 관리 시스템의 민낯을 더 이상 외면해선 안 된다.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골든타임’일지도 모른다.
강승현 사회부 기자 byhuma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