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현장을 가다]설립 75주년 앞두고 존재감 상실 트럼프 중동평화구상 사실상 방관… 아랍 주요국, 이-팔 분쟁 발빼기 美 관계 탓에 이스라엘 인정… 팔레스타인, 피로감 크고 희망 상실
이집트 수도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 근처에 위치한 아랍연맹 본부. 건물이 낡은 데다 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폐쇄적인 인상을 준다. 카이로=이세형 특파원 turtle@donga.com
이세형 카이로 특파원
이 광장 주변에 대형 녹색 깃발이 휘날리는 사각형 건물이 있다. 다음 달 탄생 75주년을 맞는 ‘아랍판 유엔’ 아랍연맹(AL·Arab League) 본부다. 아랍권의 영향력 및 공동 이익을 늘리자는 취지로 설립됐고 1964년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탄생에 기여했다. ‘세계의 화약고’ 중동에서 아랍권을 대표하는 단체로 수십 년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하지만 최근 아랍연맹의 행보는 낡은 본부 건물 모습만큼 실망감을 안긴다. 국제기구로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행사 개최나 정책 발표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미국-이란 갈등, 리비아 내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의 노골적 친이스라엘 행보 등 현안이 산적해 있는데도 아랍연맹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비판이 거세다.
○ 이집트 입김 강하고 GCC 출범으로 단결력 약화
회원국 대표가 모두 참여하는 정기 이사회는 보통 연 1회 열린다. 현 수장은 이집트 외교관 출신의 아흐메드 아불 게이트 사무총장(78). 2016년 7월부터 재직 중인 그를 포함해 역대 8명의 사무총장 중 7명이 이집트인이다.
이처럼 아랍연맹 내에서 이집트의 주도권이 강하다는 점은 내부 분열을 야기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사우디 등 이슬람 원리주의 성향이 강한 회원국들은 이집트가 1979년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자 격렬히 반발하며 이집트를 연맹에서 추방했다. 1979∼1989년 아랍연맹 본부는 튀니지 수도 튀니스에 있었다. 이 기간 사무총장을 지낸 튀니지 정치인 체들리 클리비 총장은 아랍연맹 역사상 유일한 비(非)이집트인 수장이다.
특히 사우디, 아랍에미리트(UAE), 카타르, 바레인, 쿠웨이트, 오만이 1981년 ‘걸프협력회의(GCC·Gulf Cooperation Council)’를 창설한 것은 아랍연맹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 GCC 회원국들은 왕정, 산유국, 중동 국가라는 공통점을 지닌 데다 수가 적어 아랍연맹보다 단결된 목소리를 내는 데 용이하다.
○ 트럼프의 친이스라엘 정책에도 무기력
이달 1일(현지 시간) 아랍연맹 회원국 외교장관들이 이집트 카이로의 아랍연맹 본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이스라엘 편향 ‘중동평화구상’에 대한 대응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카이로=신화 뉴시스
이 안에는 그간 국제사회가 금기시해 온 △이스라엘의 요르단강 서안지구 정착촌 인정 △팔레스타인 수도의 예루살렘 밖 설립 △팔레스타인 국방력 불인정 등이 담겼다. 성일광 건국대 중동연구소 연구원(한국이스라엘학회장)은 “이스라엘의 이익만 고려한, 사실상 팔레스타인을 완전히 무시한 조치”라고 지적했다.
한 팔레스타인인은 기자에게 “기대도 안 했지만 아랍연맹의 현주소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존재 이유를 모르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 이집트인은 “무능한 조직이다. 역대 사무총장이 대부분 이집트인이었다는 사실조차 부끄럽다”고 토로했다.
이는 과거 ‘이스라엘 결사반대’를 외치던 상당수 회원국의 태도 변화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한때 이스라엘을 원수로 여겼던 ‘수니파 맏형’ 사우디는 ‘시아파 맹주’ 이란을 견제하기 위해 이스라엘과 부쩍 밀착하고 있다. 적의 적은 친구라는 논리에서다. 사우디 실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2018년 미 시사잡지 ‘애틀랜틱’ 인터뷰에서 “이스라엘도 자기 땅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했다.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사우디의 공식 입장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그는 중동평화구상을 기획한 트럼프 대통령의 유대계 맏사위 재러드 쿠슈너 백악관 선임고문과 친밀한 사이로도 유명하다.
UAE, 카타르, 쿠웨이트 같은 나라 역시 반(反)이스라엘보다 왕정 체제 유지 및 탈(脫)석유화를 더 시급한 과제로 여긴다. 이들은 국토 면적이 넓고 각각 8000만 명이 넘는 인구를 보유한 이란과 터키, 호시탐탐 중동을 노리는 러시아, 이슬람국가(IS) 등 테러단체의 난립에 맞설 안보 여건이 취약해 미국과 절대적으로 협력해야 하는 위치다. 과거와 달리 일방적으로 팔레스타인 편을 들어주는 아랍 국가가 사라졌다는 말까지 나온다.
○ 팔레스타인도 자포자기
아랍연맹이 중동평화구상에 형식적으로만 반발하는 이유는 당사자 팔레스타인조차 극심한 내부 분열에 휩싸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현재 팔레스타인은 요르단강 서안을 통치하는 PLO, 원래 PLO가 지배했지만 2007년부터 무장단체 하마스가 통치하는 가자지구로 완전히 나뉘어 있다.
온건 중도 성향의 PLO와 이란의 지원을 받는 하마스는 대미(對美) 및 대이스라엘 노선에서 완전히 다른 성향을 보인다. 2004년 야세르 아라파트 전 PLO 수반이 숨진 후 팔레스타인을 대표할 만한 거물 정치인이 등장하지 않고 있는 것도 양측 분열을 부추기고 있다.
팔레스타인이 1948년 이스라엘 건국 후부터 다양한 형태의 무장투쟁 및 외교전을 펼쳤지만 별다른 소득을 거두지 못한 것도 팔레스타인을 넘어 아랍권 전반의 무력감과 패배의식을 고조시키고 있다. ‘이-팔 분쟁의 승패는 이미 결정됐다’, ‘무엇을 해도 안 된다’는 자괴감이 상당하다는 의미다.
2018년 5월 트럼프 행정부가 이스라엘 주재 미국대사관을 최대 도시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전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가 모두 성지로 꼽는 예루살렘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 역사를 상징하는 장소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팔레스타인과 아랍연맹 모두 대사관 이전을 저지하지 못했다.
한 팔레스타인인 대학교수는 “3월 이스라엘 총선에서 반아랍·극우 성향이 강한 네타냐후 총리 대신 중도 베니 간츠 청백당 대표가 집권한다 해도 현 상황이 별로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며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고 한숨을 쉬었다. 냉혹한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질서 속에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승패가 사실상 결정됐다는 의미다.
이세형 카이로 특파원 turt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