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스스한 머리의 만화광 청년이 오스카상 탔다는게 아직도 안믿겨 매번 10만 원어치 이상 구입… 日 작품보다 유럽-국내 단편 선호 모아놨다면 창고 하나 가득 찼을것”
2003년 영화 ‘살인의 추억’ 개봉 후 본보와 인터뷰하는 봉준호 감독. 손에 든 영국 만화 ‘프롬 헬’은 19세기 영국 런던에서 벌어진 여성 연쇄 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동아일보DB
감독 이전 만화가, 만화 수집가였던 봉준호 감독을 이곳에서 오래도록 지켜본 김기성 전 한양문고(한양툰크) 대표(61·사진)는 “부스스한 머리로 만화에 심취해 있던 한 청년이 오스카상을 탔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영화 ‘설국열차’가 개봉하고 나서 봉준호 감독이 한양문고에 찾아와 남긴 사인과 감사의 글. 김기성 씨 제공
“고독하게 서점을 찾아와 생각에 잠기던 청년이었어요. 영화감독이라는 얘기를 듣고, 그가 작품을 구상한다는 걸 알게 됐죠. 골격이 커서 항상 눈길이 갔습니다.”
봉준호 감독이 작품 구상을 위해 즐겨 찾던 서울 마포구 홍대입구역 인근 만화 전문서점 한양문고(한양툰크)의 내부 모습. 현재는 카페가 들어섰다. 씨엔씨 레볼루션 제공
“어디에 무슨 책이 있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고, 여러 책을 끄집어내느라 늘 책장을 어지럽혔어요.(웃음) ‘이 전집 다 주세요’라는 말은 하지 않았어요. 신중하게 몇 권을 추려냈죠.”
봉 감독은 매번 10만 원어치 이상 만화책을 사는 ‘큰손’이었다.
봉 감독의 만화 취향은 영화 취향으로도 이어졌다. 나루토, 원피스 등 일본 인기 시리즈보다는 유럽, 국내 작가의 단편을 즐겼다. 김 전 대표는 “확실히 유럽 작가의 단편 만화나 국내 작가들의 향토적, 인디적 작품을 선호했다”며 “평범한 소재에서 독특한 걸 들춰내는 그의 영화를 보면 만화들이 토대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봉준호 감독이 직접 그린 ‘기생충’ 스토리보드. 그는 작품 콘티를 일일이 그리기로 유명하다. CJ ENM 제공
봉 감독이 한양문고 단골이었다는 사실을 잘 아는 주변 출판인들은 김 전 대표에게 ‘오스카 수상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봉 감독 영화에 제가 기여한 바는 없지만 뿌듯합니다. 만약 봉 감독이 한양문고에서 샀던 만화책들을 안 버리고 모아 놨다면 방이나 창고 하나는 가득 찼을걸요?”
김기윤 기자 pe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