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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의 항변은 국가권력의 폭력에 맞선 民의 실천”

입력 | 2020-02-13 03:00:00

‘춘향전, 역사학자의 토론과 해석’ 책 펴낸 오수창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오수창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춘향전은 논리에 앞서 실천으로 지배 체제를 깬 민중의 실천을 보여 준다”며 “내 연구는 국문학자들이 앞서 정리한 역주본과 연구 성과 덕”이라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유부(有夫) 겁탈하는 것은 죄 아니고 무엇이오. … 팔자 좋은 춘향 몸이 팔도 방백 수령 중에 제일 명관 만났구나. 팔도 방백 수령님네 치민(治民)하러 내려왔제, 악형하러 내려왔소.”(춘향전 ‘완판 84장본’에서)

춘향이 수청을 강요하는 신관 사또에게 대거리하며 맞서는 ‘춘향전’ 대목이다. 당대의 백성은 이 대목에서 얼마나 통쾌했을까. 춘향전은 조선 후기의 신분 질서를 부정하면서 근대적 이념과 논리를 제시했다는 해석이 자리 잡고 있다. 정반대의 해석도 있다. 하층민에게까지 열녀가 되기를 요구하는 춘향전은 지배계층의 통치 논리를 강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 중후기 정치사회를 연구하는 오수창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62)가 최근 ‘춘향전, 역사학자의 토론과 해석’(그물)을 출간하며 새로운 해석을 내놨다. 7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연구실에서 만난 오 교수는 “지금까지의 상반된 두 가지 해석은 각각 속류 민중주의와 허무주의에 빠진 것”이라고 말했다.

“얼마나 지켜졌느냐는 별도로 하고 조선시대 수령이 기생(관기)을 포함한 읍비(邑婢·지방관아의 노비)와 동침하는 건 엄연한 불법이었습니다. 춘향이 표방한 정렬(貞烈)은 체제가 기생에게 허락한 범위 안에 있었고 춘향은 사또에게 법을 지키라고 요구한 것뿐이지요.”

오 교수는 “그런 면에서 춘향이 질적으로 새로운 논리를 제시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럼 춘향은 그저 지배체제의 이념에 순응한 것일까.

오 교수는 “사회 최하층의 나이 어린 기생이 관아 마당에서 지방의 최고 권력자와 정면으로 대결한 것 자체가 조선후기 국가권력의 불법과 폭력에 맞선 민(民)의 실천을 상징한다”고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한문본에서 매우 부드러웠던 대결 장면은 한글 이본(異本)들에서 점점 격렬하게 그려진다. 사또도 단순한 탐관오리가 아니라 체제의 대표자 성격이 뚜렷해진다.

춘향의 행동에 대한 기존의 상반된 해석 두 가지는 500년을 지속한 조선이라는 나라와 체제의 세련됨, 뒤집어 말하면 교활함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오 교수는 “민본주의를 표방한 조선의 지배층은 전근대사회임에도 특권을 상당히 억제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는 움직임을 효과적으로 억압했다”고 말했다.

이런 맥락에서 봐야 통치 이념의 보편성을 끌어다 자신의 가치를 천명한 춘향의 저항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 당대 민중이 춘향전을 열렬히 지지한 것도 처절하고도 찬란한 저항의 모습에 반해서였다는 얘기다.

“계몽주의가 등장하고 그에 따라 근대가 만들어졌다는 식으로 새로운 이념과 사상이 세상을 바꾼다는 통념이 있지만 역사를 보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춘향전이 보여주듯 민(民)의 저항과 실천은 새로운 이념에 앞서 나타납니다. 낡은 질서가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는 없으니까요. 오늘날 ‘법과 상식을 지키라’는 운동이 비록 논리적으로는 새로울 게 없다고 해도 이미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 있다고 봅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