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92화> 중국 下
1930년대 초반 임시정부 승인 아래 결성된 한인애국단은 이봉창과 윤봉길, 두 의사의 의거를 비롯한 의열 투쟁을 전개하면서 침체된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1932년 4월 훙커우 거사 사흘 전 윤봉길 의사의 한인애국단 선서식 모습(왼쪽 사진). 1931년 3월 일본 도쿄로 떠나기 전 수류탄을 양손에 들고 기념촬영을 한 이봉창 의사. 동아일보DB
○ 첫 투쟁―도쿄 일왕 처단 계획
상하이 싱안루(興安路)에 서 있는 홍콩플라자 건물은 100여 년 전 평범한 주택이었다. 옛 주소는 맥새이체라로 24호. 1922년 10월 28일 김구 김인전 등 독립운동가 7명은 이곳에서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한다. 그해부터 1932년까지 10년 동안 100만 원의 자금을 확보하고 1만 명의 군인을 양성한다는 계획도 세운다. 초기에는 중국 각처의 군사학교에 학생들을 파견하고 무장독립 투쟁을 준비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자금난을 이기지 못하고 노병회는 중도에 해체된다.
다만 노병회의 정신은 ‘병인의용대’를 통해 명맥을 이어간다. 병인의용대는 의열(義烈) 투쟁을 투쟁 방법으로 채택했는데 노병회에 이어 발족한 한인애국단이 이를 이어받았다. 이후 의열 투쟁이 본격화되면서 잠시 주춤했던 임시정부의 상황도 다시 활기를 찾는다.
중국 상하이에서 김구가 거주했던 융칭팡. 상하이=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일본에서 노동자로 일하던 이봉창 의사는 의거가 있기 1년 전인 1931년 상하이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였던 마당로 건물에 무작정 찾아온다. 당시 김구는 자신이 아꼈던 경호원 한태규가 일제의 밀정이라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고 외부인을 믿지 못하던 때였다. 일본어가 유창한 이 의사에 대해서도 경계심을 풀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의사가 의거를 실행하는 데 1년이 걸리게 된 이유다.
이 의사 의거의 밑그림이 그려진 것은 그가 임시정부 직원들과 술을 마시면서 나누는 대화를 김구가 듣게 되면서부터다. 동아일보 1946년 1월 10일자에 실린 ‘이봉창 의사 추모기’에 당시 상황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이 의사는 열띤 목소리로 “작년에 왜왕이 하야마에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구경을 갔더니 왜왕이 바로 나의 앞을 지나갑니다. 그때 전신의 피가 끓어오르는 듯하여 만일 내 몸에 무기만 지니고 있다면 왜왕을 한 번에 처치할 일을 해볼 터인데…그만 좋은 기회를 놓치었지요”라며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다. 이를 들은 김구는 며칠 뒤 그가 묵고 있는 여관으로 비밀리에 찾아갔고, 일왕 암살 계획이 세워진다.
이 의사가 던진 폭탄은 일왕이 탄 마차를 바로 뒤따르던 두 번째 마차 밑에서 터졌다. 그는 이 마차에 일왕이 탔으리라 짐작했지만 마침 일왕은 선두 마차에 타고 있었다. 그는 심문 과정에서 “내가 흥분한 탓에 생긴 착오였다”며 공격 목표로 삼은 인물이 일왕이었음을 분명하게 밝혔다.(한국독립운동사시스템, ‘독립운동의 역사’)
상하이 루쉰공원(옛 훙커우공원)의 매헌기념관. 상하이=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현재는 루쉰공원으로 이름이 바뀐 훙커우공원까지는 차로 20여 분 거리다. 공원 안으로 들어가 5분 정도 걷다 보면 윤봉길 의거 기념관이 나온다. 이곳에서 40m 떨어진 지점에 1998년에 세워진 기념비도 있다. 윤 의사의 아호인 ‘매헌(梅軒)’이 적힌 현판 아래 기념관 1층에는 관련 자료가 전시돼 있었다. 기념관 안 추모 흉상 앞에는 꽃다발이 가득했다.
1932년 3월 윤봉길 의사는 훙커우의 일본군 무기창고 폭파 계획을 세웠었다. 그러나 폭탄 제작 과정에서 시일이 지연돼 계획이 중단됐다. 그때 시험했던 도시락과 수통 모양의 폭탄을 그는 한 달 뒤 훙커우 의거에서 사용하게 된다. 4월 29일 훙커우공원에선 일왕의 생일과 상하이사변 승전을 축하하는 의식이 거행됐다. 일제 군부와 정관계 주요 인사들이 모이는 자리였다. 거사 전날 윤 의사는 두 아들에게 남기는 시를 작성해 김구에게 건넸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라는 내용이었다.
훙커우 거사 직전 일왕 생일과 승전 축하식 장면. 동아일보DB
윤 의사는 자폭용으로 가져간 도시락 모양의 폭탄을 꺼내다가 검거된다. 이날 의거는 침체됐던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넣는 전환점이 된 일대 사건이었다.(‘독립운동의 역사’) 기념관에서 만난 30대 한국인 관광객은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방문했는데 영상과 자료를 보니 울컥해진다”면서 “교과서나 역사책에서만 보던 윤봉길 의사 의거를 현장에서 확인하니 마음도 숙연해진다”고 말했다.
윤 의사의 훙커우 의거 직후 동아일보는 ‘호외’를 발행했다. “조선인이 폭탄을 던졌다”는 내용이었다. 같은 날 두 번째 호외를 통해 머리기사 제목으로 ‘조선인으로 판명, 윤봉길, 연령 25세’라면서 윤 의사의 이름과 신상을 처음으로 보도했다. 상하이 현지 신문도 윤 의사의 신원을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 호외는 현재 상하이 마당로의 임시정부 청사에 전시돼 있다.
▼ 조선총독 폭살계획… 다롄 의거… 한인애국단, 5개월간 6건 거사 ▼
제시간에 폭탄 설치 못해 실패한 황푸강 日이즈모함 폭파 시도 등
대담한 독립투쟁에 日충격
한인애국단의 대표적인 거사는 이봉창 윤봉길 두 의사의 의거이지만, 이 밖에도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투쟁이 끊임없이 펼쳐졌다. 1932년에 접어들어 한인애국단의 주도로 준비되거나 실천에 옮겨진 거사는 5개월 동안 6건에 달했다.
이봉창 의사의 의거가 펼쳐진 1개월 뒤인 1932년 2월에는 이즈모함 폭파 시도가 추진됐다. 황푸강 훙커우 부두에 정박 중인 일본 군함 이즈모에 일본군사령부가 설치됐다는 정보를 입수한 김구는 한인애국단에 이즈모함을 폭파할 것을 명령한다. 이즈모함에 잠수로 접근한 뒤 특수폭탄을 설치하고 시간을 정해 폭파한다는 계획이 세워졌다. 단원 중에서 잠수할 사람이 마땅치 않자 당시 1000원이라는 큰 금액을 주고 중국인 잠수부를 고용했다. 거사일은 2월 12일로 정해졌다. 하지만 거사는 실패하고 만다. 용병으로 채용된 중국인 잠수부들이 두려움에 떨다가 제시간에 폭탄을 설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연대기’)
‘조선총독 폭살 계획’과 ‘다롄 의거’는 이봉창 윤봉길 두 의사의 의거와 함께 한인애국단의 4대 의거로 꼽힌다. ‘조선총독 폭살 계획’은 김구의 지시로 이덕주, 유진만이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를 암살할 목적으로 진행했다. 하지만 이들은 1932년 4월 일본 경찰에 체포돼 징역형을 받는다.
‘다롄 의거’ 역시 실패로 끝났지만 그 대담성으로 일본에 충격을 줬다. 5월 26일 빅터 불워리턴 단장이 이끄는 국제연맹조사단이 다롄역에 도착했을 때 이를 맞은 혼조 시게루 관동군사령관 등에게 폭탄을 던질 계획이었다. 그러나 의거를 며칠 앞두고 다롄 우체국에서 보낸 비밀 전문이 일본군 정보망에 발각된다. 이로 인해 폭탄을 던지는 임무를 맡았던 유상근 의사와 정보 수집 역할을 맡은 최흥식 의사 등이 체포됐고, 계획은 무산되고 만다.
상하이=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