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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정에 안 나와 모르겠다”… ‘매뉴얼 함정’에 빠진 日

입력 | 2020-02-15 03:00:00

[코로나19 확산]크루즈선 대책 허둥대는 일본 왜?




‘크루즈선의 명암’ 캄보디아선 하선, 日은 아직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 우려로 일본, 미국, 태국, 필리핀, 대만 등 5개국에서 입항을 거부당했던 크루즈선 ‘웨스터댐’호 승객들이 14일(현지 시간) 캄보디아 시아누크빌항에서 하선한 후 두 팔을 들어 환호하고 있다(위쪽 사진). 같은 날 일본 요코하마항 앞바다에 정박 중인 크루즈선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에 격리된 승객들(아래쪽 사진). 일본 정부는 이 배의 탑승객 중 감염자를 제외한 약 3500명을 19일까지 선내 격리하기로 했으나 확진자가 급증하자 이날 오후부터 80세 이상 고령자 등 일부를 하선시켰다. 시아누크빌·요코하마=AP 뉴시스

일본을 공포에 몰아넣은 크루즈선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 집단감염 사태로 일본 특유의 매뉴얼 문화가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선례가 있는 위기가 발생했을 때는 규정과 지침에 따라 일사불란하고 치밀하게 대응하지만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같은 돌발 상황이 발생하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둥댄다는 의미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기도 ‘전례가 없어서 어렵겠다’, ‘규정에 나와 있지 않아 처리할 수 없다’는 말로 발등의 불만 모면하려다가 적절한 대응 시점을 놓쳤다는 비판이 거세다.


○ 후쿠시마 이어 매뉴얼 사회 한계 노출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한 후쿠시마 원전 폭발 후 세계 각국에서 구호물자가 속속 도착했다. 하지만 일본은 구호물자 처리 방침이 없다는 이유로 주민들에게 신속하게 물품을 전달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자원봉사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밥과 국을 자신의 차에 싣고 와 나눠줬다. 외국에서 달려온 의료진 역시 일본 면허에 대한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주민을 돌보지 못했다.

당시 원전의 추가 폭발 위험도 높았다. 바닷물을 끌어다가 원자로를 냉각시키자는 방안이 제시됐다. 정부는 관련 지침이 없다는 이유로 고민하다가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결국 추가 폭발이 발생해 피해가 더 커졌다.

2014년 3월 중부 야마나시현에 전례 없는 폭설이 내렸다. 한시가 급했지만 이 지역 공무원들은 상당 기간 제설 작업에 동원되지 못했다. 현에서 정한 직원 소집 조건에 ‘지진’과 ‘태풍’만 있었기 때문이다.

코로나19가 발생하자 일본은 중국에 전세기를 보내 국민들을 귀국시켰다. 하지만 귀국한 시민들을 강제 격리하지 않았다. 관련법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결국 자택 대기 환자 1명이 확진 판정을 받았다. 방역 당국은 그와 접촉한 가족과 이웃을 추가로 검사해야 한다. 온라인에서는 ‘어처구니없는 정부의 격리 대책’이란 비난이 빗발쳤다.

일본은 3일 요코하마항에 입항한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를 두고도 우왕좌왕을 거듭했다. 탑승객 3711명에 대한 전수조사, 탑승객 관리, 하선 시점을 놓고 갑론을박만 계속했다. 결국 전수조사를 못 했다. 14일에야 80세 이상 일부 고령자만 하선시킨 가운데 이날까지 무려 218명의 확진자가 발생했다.


○ 황당 매뉴얼도 속출… 위기 모면용 비판 거세

이런 매뉴얼 문화는 일본 특유의 집단지향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사면이 바다로 막힌 섬나라이다 보니 다툼과 분쟁이 생겼을 때 피할 곳이 없고 이해관계자 모두가 피해를 볼 가능성이 크다.

이에 따라 상부의 지시에 각 계급이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톱다운(top-down) 의사결정 구조도 고착화됐다. 상당수 일본인이 “한 번 만든 법, 규칙, 매뉴얼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상대방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메이와쿠(迷惑) 문화도 매뉴얼 득세 풍조에 한몫하고 있다.

매뉴얼대로 움직이면 안정적인 대처가 가능하지만 ‘경우의 수’를 모두 담은 완벽한 매뉴얼은 존재하기 어렵다는 게 문제다. 게다가 코로나19, 2008년 세계 금융위기 같은 블랙스완(검은 백조처럼 현실에 존재할 가능성이 극도로 낮은 위기)이 터졌을 때 매뉴얼만 믿다 보면 행정편의주의와 관료주의로 변질될 위험성이 상존한다. 매뉴얼에는 없는 주체적 판단과 기민한 상황 대처 능력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매뉴얼을 지나치게 과신하다 보니 ‘황당 매뉴얼’도 종종 등장한다. 후쿠시마시는 2014년 지진 대처 매뉴얼을 공개했다. ‘섬유질과 발효식품 등을 먹고 용변을 잘하라’ ‘실내 환기를 자주 시키고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꼭 양치질을 하라’는 조언이 담겼다. 분노한 주민들이 “공무원들의 뇌가 방사능에 오염된 것 아니냐”는 독설을 퍼부었다.

지난해 5월 집권 자민당은 과거사, 여성 혐오 등에 관한 의원들의 망언이 이어지자 실언 방지 매뉴얼을 배포했다. ‘쉼표를 사용해 길게 얘기하지 말라’ ‘마침표를 활용해 짧은 문장을 써라’ ‘혼잣말하면 말꼬투리가 잡히기 쉽다’ 등이 포함됐다. 역시 “통렬한 반성이 우선인데 꼼수로 외면하려 한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환자 수를 줄이려는 일본 정부의 ‘눈 가리고 아웅’식 시도 역시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당국은 “상륙 전 감염됐다”며 218명의 크루즈선 확진자를 일본 확진자 통계에 포함시키지 않고 있다. 7월 24일 개막하는 도쿄 올림픽의 흥행 차질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 하지만 이 중 110명이 일본인이다. 언론은 ‘코로나 발원지인 중국 후베이성 우한에서 전세기로 귀국한 일본인들도 일본에 오기 전 감염됐지만 확진자 통계에 포함시킨다’며 앞뒤가 안 맞는 행태라고 비판했다.

12일 아사히신문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의 코로나19 대응을 날카롭게 꼬집는 만평을 게재했다. 아베 총리로 보이는 의사가 마스크를 쓰고 청진기를 들었다. 그는 사람의 복부가 아닌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 선체에 청진기를 들이댔다. 배에 갇힌 탑승객이 이 모습을 보고 기가 막힌 듯 혀를 찼다. 미 뉴욕타임스(NYT)는 “일본이 공중보건 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않는 방법에 대한 교과서적 예를 제시하고 있다”고 비꼬았다.

도쿄=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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