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사회적 위험 예측 필요한 시대지만 한국선 일 터진 뒤 우왕좌왕하다 땜질처방 여야 넘어 국민 공유할 미래지도 만들어야
김상협 KAIST 지속발전센터장·우리들의 미래 이사장
한국은 의료 선진국으로 알려진 프랑스(11위), 독일(14위), 일본(21위)을 제치고 세계 9위였다. 과연 그 조사 결과가 맞는지 의구심이 들 법한데 300쪽이 넘는 세부자료를 보면 짚이는 게 있다. 한국의 의료보건 인력수준과 역량은 세계 최고인 반면에 정부의 효과성과 정치적 역량을 체크하는 ‘정치 리스크’ 항목에서는 남미 우루과이(25위)보다도 떨어지는 27위로 나온다. 한국의 전염병 리스크는 의술이 아니라 정치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질병을 극복해 온 과거가 인류의 미래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올 1월 다보스에서 세계경제포럼이 발표한 글로벌 리스크 보고서는 전염병을 10대 리스크로 손꼽으며 더 심각한 문제는 ‘상호연결 리스크(interconnected risk)’에 있다고 경고했다. 세계화, 도시화, 고령화가 기후변화와 맞물려 이 리스크가 증폭, 변종되며 발생 주기도 짧아질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진정세지만 또 언제, 어떤 식으로 신종 전염병이 돌발할지 모르는 초연결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얘기다.
아쉽게도 한국에는 그런 게 아예 없다. 글로벌은커녕 국내 리스크에 대해서도 경향과 경중을 파악하고 대책을 세우지 않는다. 그러니 매번 일이 터질 때마다 마치 처음 겪는 것처럼 우왕좌왕하다가 땜질식 대증처방에 그친다. 리스크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처방을 이끌어내야 할 정치가 그런 식이니 우리의 ‘위험사회’는 위험을 반복한다.
리스크는 ‘용기 있게 도전한다’는 라틴어 ‘riscare’에 어원을 두고 있는데 대항해시대에 들어서며 ‘극복해야 할 암초’라는 용어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미지의 항로를 개척하려면 리스크가 어디에, 어느 정도 있는지를 알아야 했기 때문인데 그런 걸 가장 잘하는 나라는 역시 미국이다. 미국 국가정보위원회가 ‘전략적 미래 그룹’ 조직을 두고 안팎의 정보자산을 총동원해 4년마다 펴내는 ‘글로벌 트렌드’ 보고서가 이를 보여준다. 지난해 10월에는 ‘진보의 역설(Paradox of Progress)’이라는 제목으로 테러리즘, 사이버공격, 바이오, 기후 변화를 미국의 장래를 좌우할 핵심으로 지목하며 ‘미래의 지도(the Map of the Future)’를 제시했다. 그 서문은 이렇다. “우리가 어떠한 이슈를 중요하게 선택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이 보고서는 미국 시민들이 수십 년 앞을 함께 내다보도록 만들었지만 차기 행정부에도 도움을 주기 위해 5년 뒤의 미래도 다뤘다.” 미국 국가정보위원회의 ‘미래 지도’는 현직 대통령을 초월해 작성되고 있다는 얘기다. 미국의 진짜 힘은 이런 것에서 나온다.
올바른 리스크 인식이 국가 안위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일깨운 대표적 인물은 윈스턴 처칠이다. 그가 만약 독일 히틀러의 야심을 미리 꿰뚫어보고 대책을 세워두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영국, 지금의 유럽이 있었을까?
한국에는 다른 나라에는 없는 커다란 리스크가 하나 더 존재한다. 북한의 핵무기다. 만약 국가 지도자가 이 같은 ‘실존적 리스크(existential risk)’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 원전괴담 영화를 보고 ‘탈원전’을 결심했고 그 바람에서 미세먼지를 유발하는 석탄발전이 그 자리를 메웠다는 풍문은 그래서 사실이 아니어야만 한다.
집권세력의 이념과 진영에 따라 국가적 위험에 대한 해석과 대응방식, 우선순위가 바뀌고 왜곡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야를 넘어 과학적 진단과 합리적 공론을 거쳐 국민이 공유할 리스크 지도를 만들어야 한다. 4차 산업혁명 파고를 헤치고 미래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서라도 그런 기초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김상협 KAIST 지속발전센터장·우리들의 미래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