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도 정권 입김 차단 방안 마련은 뒷전 기업일탈 방지가 연금의 목적 될 수 있나
고기정 경제부장
“롯데사태는 집안 재산 싸움인데 신 씨들의 싸움 때문에 피해 보는 것은 우리 국민들이다. 이럴 때 당연히 국민연금이 나서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현 집권 세력이나 친여 성향 시민단체에서 나온 발언처럼 읽힐 것이다. 그런데 아니다. 첫 번째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책사였던 곽승준 당시 대통령직속 미래기획위원장이 2011년에 한 말이다. 두 번째는 박근혜 정권 때인 2015년 김무성 당시 새누리당 대표가 했다. 한 기업인에게 ‘비즈니스 프렌들리’였던 보수정권에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강화가 성사됐다면 이를 받아들일 수 있었겠냐고 물었다. 그는 “과거 두 정권에서 생긴 비리사건에 기업들이 끌려 들어가 지금까지 고생하고 있지 않냐”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정부는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 이유로 장기 수익성 제고와 함께 ‘기업의 일탈 방지’를 들었다. 기업들도 이 대목에선 자유롭기 어렵다. 그런데 기업이나 기업주가 일탈 행위를 하면 지금도 관련 법률에 의해 처벌당한다. 현행 285개 경제 관련 법령에는 2657개 처벌항목이 있고, 그중 2205개는 종업원이나 회사가 잘못해도 최고경영자(CEO)까지 처벌하도록 한다. 그럼에도 국민의 노후자금을 맡아 놓은 정부가 주식투자를 빌미로 기업의 일탈을 예방적 차원에서 감시하겠다고 하니 그 의도가 의심받는 것이다.
최준선 성균관대 교수에 따르면 원래 연기금이나 기관투자가의 주주권 행사 지침(스튜어드십 코드)은 영국에서 생겼다. 단일 오너가 없는 영국 기업들의 특성상 CEO가 사익을 편취할 수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감시를 연기금이나 기관투자가에게 맡긴 것이다. 더욱이 월급쟁이 CEO는 장기적 성장동력보다 재임 기간의 단기 성취에 경도되기 쉽다. 이런 ‘대리인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장기 투자를 하는 연기금이나 기관이 나서라는 게 제도 도입 취지다. 한국 기업은 서구와 달리 오너 경영 체제다. 한국 기업들이 장기 투자가 필요한 산업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건 오너 체제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측면이 있다.
보수든 진보든 권력을 잡으면 기업부터 주무르고 싶어 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기업 오너들을 불러서 고용과 투자 목표를 내놓으라고 하고, 말 안 들으면 사법적으로 길들이고, 사회적 책임이라며 정부가 해야 할 사업에 돈 내놓으라고 하고, 정권 공신들 한몫 챙겨주기 위해 기업더러 자리를 내놓으라고 해왔다. 정부가 올해부터 사외이사 임기를 6년으로 제한한 데 대해 사외이사 시장을 물갈이해 여권 사람들을 낙하산으로 내려 꽂기 위한 꼼수라는 말부터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국민연금이 건전한 주주로서 의결권을 행사하려면 내부 지배구조부터 바꿔야 한다. 기금운용위원회 위원장을 보건복지부 장관이 맡고 있고, 위원 20명 중 17명이 공무원이거나 친정부 성향 인사로 채워질 수 있는 현 구조에선 국민연금의 정당한 의결권 행사조차 그 의도를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그동안 수차례 나왔던 이 지적에 대해 정부는 이번에도 의결권 행사 강화를 먼저 하되 기금운용위 구조 개편은 차차 검토하겠다고 했다. 이 정부에서도 기업을 놔줄 뜻이 없어 보인다.
고기정 경제부장 ko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