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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개미들을 밟아 죽였다[정미경의 이런 영어 저런 미국]

입력 | 2020-02-17 03:00:00


평소엔 멀쩡하게 잘 걸어 다니다가 성폭행 혐의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자 보조기구를 짚고 노쇠한 모습으로 등장한 하비 와인스타인(왼쪽에서 세번째). 뉴욕타임스 웹사이트

정미경 국제부 전문기자·前워싱턴 특파원

영화 ‘기생충’을 만든 봉준호 감독이 미국에서 홍보 투어를 할 때 가장 많이 받은 질문 중 하나는 영화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과의 관계였다고 합니다.

2014년 ‘설국열차’ 미국 개봉 때 와인스타인이 “러닝타임이 너무 길다”며 20분 분량을 자르라고 봉 감독에게 요구했던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6년이 지난 지금 봉 감독은 아카데미가 인정한 거장이 됐고, 와인스타인은 성폭행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와인스타인은 성범죄자용 전자발찌를 차고 아카데미상 시상식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인재를 몰라봤네, 몰라봤어.”

△“I wanted to pretend it never happened.”

재판에는 6명의 여성이 증인으로 출석해 와인스타인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고 증언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5번째 증인으로 출석한 여배우 애너벨라 쇼라. 그녀의 증언 중 기억에 남는 한마디는 “나는 그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가장하고 싶었다.” 다른 여성들의 증언에서도 똑같이 나온 말이었습니다. 수치심과 모욕감이 얼마나 컸으면 아예 성폭행 자체가 없었다고 스스로 믿으려고 애쓰면서 부인하고 싶었겠습니까.

△“He treated women who he tricked into entering his lair like ants he could step on without consequences.”

이번 재판은 ‘여인들의 전쟁’이었습니다. 증인뿐 아니라 검사와 변호사 모두 여성들이 출전했습니다. 뉴욕 맨해튼 검찰의 조앤 일루지오번 검사는 최종 발언에서 비주얼적으로 와인스타인의 유죄를 주장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소굴로 꼬드겨 데려온 여성들을 아무런 이유 없이 밟아 죽일 수 있는 개미처럼 취급했다.” ‘Lair’는 쉽게 보기 힘든 단어인데 인간이 아닌 동물의 거처를 말합니다.

△“I would never put myself in a position to be sexually assaulted.”

와인스타인의 변호사 도나 로투노는 성범죄 혐의를 받는 부자 남성들을 무죄 방면시켜 주는 전문 변호사입니다. ‘여걸’로 불리기도 하지만 원색의 원피스에 하이힐을 신고 법정에 등정하는 그녀의 변호 스타일은 논란의 소지가 많은데요. 이번에도 최종 변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 같으면 성폭력을 당할 소지가 있는 상황에 처하지 않는다.” 즉 성폭행을 당한 여성의 잘못이라는 것이지요.
 
정미경 국제부 전문기자·前워싱턴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