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영화제 개척 1세대 임권택 감독
임권택 감독이 13일 경기 용인시 자택에서 부산국제영화제 후원사였던 에르메스가 특별 제작해 헌정한 의자에 앉았다. 그는 “트로피와 상장 등 모든 자료를 동서대 임권택영화박물관으로 보냈다. 이 의자만 유일하게 갖고 있다”고 했다. 용인=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아파트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자주색 스웨터에 짙은 회색 재킷을 입은 임 감독이 서 있었다. 집 현관문도 활짝 열어 놓았다. 임 감독이 손수 차를 끓이자, 외출하고 돌아온 부인 채령(본명 채혜숙·69) 여사가 서둘러 거실로 모셨다. 소파에 앉은 임 감독은 특유의 느릿느릿한 말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는 “한국 영화가 도달하고자 하는 정점까지 봉 감독이 끌어올렸다”고 했다. 지난해 ‘기생충’을 본 뒤 봉 감독에게 전화해 칭찬했다.
“평소 영화를 보고 나서 감독에게 전화하지 않는데 ‘기생충’은 작품성이 대단히 뛰어났거든요. 수준 높은 사람들의 역량이 가득 들어백힌(박힌) 영화예요.”
그는 ‘살인의 추억’(2003년)을 봤을 때를 떠올렸다.
“‘큰일 낼 사람이다. 봉 감독 일내겠구나’ 생각했어요. 그래서 ‘마더’, ‘설국열차’도 챙겨 봤어요. 모두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영화는 아니지만요.(웃음)”
“아카데미는 짜도 너무 짰어요. 하도 외면을 당하니까 욕이 나와요. 저놈들이 봉 감독에게도 그러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기생충’이 워낙 세니까 성과가 있을 거라고 확신했어요. 그런데 저렇게 통쾌하게 휩쓸지는 몰랐죠.”
임 감독의 얼굴에 미소가 환하게 번졌다. 다음 달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손자 지우에 대해 말할 때와 같은 표정이었다. 그는 아카데미 투표권이 있는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 회원이다. 2015년 봉 감독, 배우 최민식 송강호 씨 등과 함께 한국 영화인으로는 처음 아카데미 회원이 됐다. 하지만 투표를 한 적은 없다고 했다.
“아카데미에서 자료를 엄청나게 보내줘요. 투표를 하려면 후보 작품들을 다 보고 공부도 해야 하는데, 솔직히 힘들어서 그럴 수가 없어요. 딴거 하나도 안 봤는데 ‘기생충’에만 표를 주면 안 되잖아요. 대신 마음으로 열심히 응원했죠.”
‘기생충’이 뛰어난 통역자와 함께 체계적으로 해외 캠페인을 벌이는 모습에 세월의 흐름을 실감했다고 한다. ‘내 작품이 도대체 어느 정도 수준인지 너무 궁금해서’ 해외 영화제에 출품했던 그는 초반에 정부 직원과 단둘이 외국에 갔다. 영화제 조직위원회가 마련해 준 호텔에서 사나흘을 지낸 후에는 돈이 없어 뒷골목 여인숙에서 머문 적도 많다. 채 씨는 “엽서를 보내왔는데 ‘별이 잘 보인다’고 쓴 거예요. 도시 외곽의 아주 낡은 숙소에서 지내는 걸 알고 어찌나 속이 상하던지요”라고 했다. 임 감독은 “처량하게 있다 왔지”라며 웃었다.
“내가 1분 넘게 말했는데 통역은 영어로 10초 정도 말하는 거예요. 영어를 모르니 제대로 전했는지 알 수도 없고….(웃음) 나중에 김홍준 감독, 유지나 교수가 기회가 되면 같이 가서 통역을 해줘 고마웠죠.”
‘씨받이’(1986년)로 강수연 씨가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을 때 시상식장에는 임 감독도, 강 씨도 없었다. 정부 직원이 대신 받았다. 상을 받을지 몰라 강 씨는 영화제에 참석하지 못했고, 임 감독은 다른 일정 때문에 먼저 출국했기 때문이다. 그는 “주최 측이 얼마나 어이가 없었겠느냐”며 껄껄 웃었다.
임 감독은 강 씨의 수상으로 자신감을 얻었다. 이후 배우들도 영화제에 참석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강 씨는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년)로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을 땐 현장에서 수상의 기쁨을 누렸다.
한국 영화에 대한 무관심 역시 처절하게 실감했다. ‘길소뜸’(1986년)으로 베를린 영화제 본선에 진출했을 때였다.
당시 상황이 떠오르는 듯 임 감독의 얼굴이 굳었다. 다시 아카데미 이야기로 돌아가자 표정이 풀리며 봉 감독이 이제 부담감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됐다며 기뻐했다. 주변의 기대가 얼마나 가슴을 짓누르는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2000년 ‘춘향뎐’이 칸 영화제 본선에 진출했을 때 수상 가능성이 높다고 연일 기사가 쏟아졌어요. 기자들이 칸으로 취재도 많이 오고요. ‘이러다 상을 못 타면 이 빚을 어떻게 다 갚아야 하나’ 걱정이 됐습니다.”
수상은 불발됐고, 임 감독은 ‘서편제’(1993년)를 만들 때 끊었던 담배를 다시 물었다. 아내와 함께 서둘러 귀국길에 올랐다. ‘취화선’으로 2002년 칸 영화제 감독상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고 한다. 채 씨는 2002년 칸에 함께 가지 않았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며 빨리 오라는 연락을 받고 시상식 나흘 전쯤 혼자 비행기를 탔다. 감독상을 받은 후 호텔방에서 와인을 마시며 임 감독은 고백하듯 말했다. “상을 탈 것 같은데 혹시 그렇게 되면 그 좋은 자리에 같이 있고 싶었다”고. 채 씨는 “이제 어깨에 얹은 짐을 내려놓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임 감독은 ‘해외 영화제 개척 1세대’라는 표현에 강하게 손사래를 쳤다.
“해외 영화제로 가는 길을 제가 만들었다는 건 맞지 않아요. 한국 영화가 주목받은 건 한국 사람들과 더불어 만들어서 그런 거지 나 혼자 중뿔나게 한 게 아니에요. 한국 영화의 수준이 높아진 건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수준이 높아진 결과예요.”
요즘 눈여겨보는 감독이 있는지 궁금했다.
“몇 사람을 꼽아 잘한다고 칭찬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실례가 됩니다. 서운하고 상처받을 수 있잖아요. 한국 영화가 많이 세련돼졌다고 생각합니다.”
“고집은 아니고요. 좋아하는 걸 정하고 줄곧 그 안에서 살았던 거죠. 그게 다예요.”
그는 지우가 태어난 후 손자 보는 재미에 빠져 있다. 거실 한쪽에는 어린이 바둑판, 로봇 장난감이 놓여 있었다. 거실과 주방에는 지우가 갓난아기 때 목욕하는 사진, 유치원 친구들과 찍은 사진들이 곳곳에 있었다. 채 씨가 “(지우가 오는) 오후 6시가 얼마 안 남았다”고 하자 임 감독의 얼굴이 해바라기처럼 피어났다. 종종 서점을 찾아 책을 사는 일도 요즘 누리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다.
“책은 손으로 한 장 한 장 넘겨보는 재미가 있어야 해요. 최근에는 종교 관련 책을 읽고 있습니다. 종교에 대한 영화를 여럿 만들어서 그 많은 종교들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알고 싶거든요.”
1979년 임 감독과 결혼한 채 씨는 그가 지금까지 올 수 있도록 뒷바라지한 일등공신이다. 임 감독은 그런 아내와 결혼한 데 대해 “로또 맞았다”고 했다. 임 감독은 인터뷰 중간중간 연도가 헷갈리면 “혜숙 씨가 보충을 해줘야지”라며 SOS를 보내기도 했다.
그래도 마음을 표현하는 건 여전히 서투른 듯했다. 정월대보름(8일)이 채 씨의 생일이었는데 챙겼느냐고 묻자 임 감독은 시선을 딴 데로 돌리며 “정월대보름은 우리 민족이 다 같이 즐기는 날이고…”라고 했다. 채 씨는 깔깔 웃으며 “가족들이 함께 모여 식사했다. 그거면 충분하다”고 했다.
앞으로 계획을 묻자 임 감독은 후진 양성에 힘쓰고 싶다고 했다. 그는 동서대 임권택영화영상예술대 석좌교수로, 특강 형식으로 학생들을 만난다.
“영화를 만들며 경험했던 걸 많이 얘기해 주고 싶어요. 돌아보니 나는 영화 만드는 걸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는 걸 다시 한번 느끼게 됩니다. 평생 슬럼프 없이 영화 일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이 큰 행복이었습니다.”
용인=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