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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는 공간을 캐릭터처럼 활용하는 연출가”

입력 | 2020-02-17 03:00:00

건축가들이 본 봉준호 영화
가구 몇개로 채운 ‘기생충’ 속 거실… 정원 감상 즐기려는 재력가 의지
‘괴물’서 배두나가 숨은 교각위 공간… 구조물 내부까지 꿰뚫는 시각 감탄
‘설국열차’의 맨 앞칸 엔진룸… 기하학적 디자인으로 권력을 상징




건축가 남궁현자가 설계했다고 설정한 ‘기생충’의 저택 세트. 영화 ‘마더’의 고속버스 댄스 장면처럼 봉준호 감독이 ‘공간에 들이치는 햇빛의 각도’를 치밀하게 계산해서 제작한 공간이다. 결말 부분 지하에서 송강호가 걸어 나오는 상상 장면에서 공간에 들이치는 빛의 역할을 확인할 수 있다. 유튜브 캡처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서 공간은 단순 배경에 그치지 않는다. 명확한 성격을 드러내며 이야기의 분위기를 형성하고 전환점을 제시하는, 중요한 조연 역할을 한다.”

건축가들은 봉 감독에 대해 한결같이 ‘공간의 특징을 속속들이 분석해 시나리오 속 캐릭터처럼 활용하는 연출가’라고 평했다. 때로 영화 속 장면으로부터 공간 설계 아이디어를 얻는다는 건축가들에게 ‘봉준호 영화 속 최고의 공간’을 물었다.

인물들의 계급 격차를 보여주는 ‘기생충’의 빗속 계단

① 비움의 능력이 재력…‘기생충’의 거실

가상의 건축가가 설계한 것으로 소개되는 저택은 이하준 미술감독이 제작한 세트다. 최성희 최-페레이라 건축사무소장은 “영화를 보다가 재미난 공간이 눈에 띄면 머릿속에서 설계도면을 구성해 보는데 기생충 속 공간들은 하나의 주택 도면으로 연결하기 어려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며 “나중에 세트라는 사실을 듣고 의문이 풀렸다”고 했다.

이치훈 SoA 건축사무소장은 “화분 하나 없이 커다란 유리창 앞에 소파와 테이블, 오디오만 놓은 거실에서는 ‘미술관 전시를 즐기듯 정원을 감상하겠다’는 집주인의 의지가 읽힌다”며 “잡동사니로 채워진 송강호 가족의 반지하 집과 완벽한 대조를 이룬다”고 했다. 생활공간에 얼마나 여백을 둘 수 있는지가 그 공간 주인의 재력을 보여준다는 설명이다. 저택은 지하 벙커 출입구 앞의 주방집기마저 마트 진열대처럼 가지런히 정렬돼 공간 여유가 넉넉해 보인다.

인물의 심리 변화를 역동적 이미지로 보여주는 ‘괴물’의 교각 구조물

② 이야기의 전환 장치로 작동하는 계단과 교각


기생충 속 공간과 기물은 배우들의 몸짓과 동선(動線)에 달라붙어 리듬감 있게 맞물려 돌아간다. 강예린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는 “지하실에서 기어 올라오는 문광의 얼굴을 충숙이 뒤로 걷어차 버리면서 손에 들었던 짜파구리 그릇을 식탁 위에 올려놓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치밀하게 설계해 배치한 공간 요소들이 뜻밖의 사건을 어색함 없이 소화한다”고 말했다.

황두진 황두진건축사사무소 대표는 ‘괴물’(2006년)에서 배두나가 활을 메고 오르내리던 한강다리 상판 하부 구조물에 대해 “건축물을 피상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부까지 속속들이 살핀 뒤 그 특징을 이야기에 녹여내는 솜씨에 감탄했다”고 돌이켰다. 교각 철제 구조물 속에 몸을 숨겼던 배두나가 그곳을 빠져나와 조카를 찾아 사다리를 오르는 장면은 인물의 결연한 의지와 반격의 분위기를 충실히 전달한다.
 

‘설국열차’의 엔진룸은 디자인의 유무가 권력의 유무를 드러낼 수 있음을 암시한다

③ “디자인이 곧 계급”…‘설국열차’의 엔진룸


김재경 한양대 건축학부 교수는 “봉 감독은 공간의 이미지를 활용해 영화 속 인물의 지위나 성격을 관객에게 알려준다”며 ‘설국열차’(2013년) 결말 부분에 등장하는 권력자의 맨 앞 칸 엔진룸을 좋은 예로 꼽았다.

“설국열차 속 모든 공간에서 기하학적인 디자인 요소를 지닌 곳은 이 칸뿐이다. 그 전의 감옥 교실 식당칸에는 ‘용도’만 보인다. 하지만 원형과 직선을 극적으로 얽은 엔진룸 설계는 이 방에 기념비성을 부여한다. 기차를 이끄는 동력일 뿐 아니라 ‘이 방 주인이 권력 정점의 인물’임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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