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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뉴얼 사회[횡설수설/서영아]

입력 | 2020-02-18 03:00:00


손정의(孫正義·손 마사요시) 소프트뱅크 회장은 1990년 일본 국적을 얻을 때 ‘손(孫)’이라는 성을 그대로 사용하길 원했다. 하지만 법무당국은 “‘손’은 일본에 없는 성”이라며 퇴짜를 놓았다. 포기를 모르는 그는 묘안을 짜냈다. 먼저 일본인 아내의 성을 ‘孫’으로 바꾼 것. 전과 같은 서류를 다시 들이미는 그에게 창구 직원이 손을 내젓자 그는 “잘 살펴보라”며 명부를 가리켰다. 딱 한 명, 아내의 이름이 올라와 있었다. ‘전례 없이는 되는 일 없는’ 일본식 장벽을 뛰어넘은 장면이다.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이 터지자 일본은 우왕좌왕했다. 세계 각국에서 구호물자가 도착했지만 ‘처리 지침이 없다’는 이유로 시급한 주민들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외국에서 달려온 의료진 역시 일본 면허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주민을 돌보지 못했다.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 원전 반경 20∼30km에 외출금지령을 내리고 ‘노출됐던 옷은 비닐봉지에 밀봉해 폐기하고 몸을 물로 씻으라’고 했지만 시민들은 “갈아입을 옷조차 없다”며 어이없어했다. ‘매뉴얼 사회’ ‘빈틈없는 정확성’을 신화처럼 간직했던 일본에 대해 ‘일본의 재발견’이란 비아냥거림도 나왔다.

▷설명서나 안내서, 지침을 뜻하는 매뉴얼은 여러 경험과 선례들 중 최선의 경우를 뽑아내 따라 할 수 있도록 객관화한 것이다. 매사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일본은 상세한 부분까지 매뉴얼로 짜놓고 초심자라도 이를 따르면 일이 되게끔 하는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지진 태풍 등 재해가 많은 탓에 톱다운식 의사결정 구조도 고착화됐다. 상당수 일본인이 “한번 만든 법, 규칙, 매뉴얼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다만 ‘매뉴얼 만능주의’는 예상 범위를 넘는 문제에 부닥치면 기능 부전에 빠진다. 멀리 크게 보지 못하고 지엽말단에 매달리면서 상상력이나 창의성, 용기는 뒷전으로 밀린다. 관료주의로 변질될 위험도 적지 않다.

▷3일부터 요코하마항에 정박 중인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 집단감염 사태는 다시금 매뉴얼에 갇힌 일본의 기억을 일깨워준다. 3700여 명이 탄 배를 놓고 일본 정부가 ‘국내 유입 원천 봉쇄’라는 단 한 가지 매뉴얼에만 매달리는 사이 크루즈선은 날마다 수십 명씩, 17일 현재까지 454명의 확진자를 양산하며 ‘제2의 우한’, ‘떠 있는 세균배양접시’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일본 정부가 7월 도쿄 올림픽을 의식해 확진자들을 국내 통계에 포함시키지 않으려 안간힘 쓴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런 관리 능력이라면 올림픽을 제대로 치를 수 있겠느냐는 비판이 나와도 할 말이 없게 됐다.
 
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