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왼쪽)와 신이현 작가
와인을 배우기 위해 매주 우리 집에 오지만 실제로 그가 가장 많이 하는 일은 와인 수업이 아니라 청소다. 탱크 닦고, 병 닦고, 나무 나르고, 난로 청소하고…. 나는 늘 미안한 느낌이지만 레돔은 “청소는 양조의 기본이야”라고 말한다. 청소뿐만 아니라 농사일도 많이 한다. 겨울 동안 뜸했는데 입춘이 지나면서 레돔은 밭에 자주 간다. 물이 빠지는 길과 바람이 오는 길을 파악하고, 사람이 다닐 길과 나무들이 살 곳을 살핀다.
“땅에 얼크러져서 퍼져나가는 저 나무, 그래, 그 칡뿌리를 좀 뽑아야겠어.” 마침 빨간 장화 총각이 온 날 레돔은 밭두렁에 뻗은 칡들을 제거하기 위해 낫과 괭이를 들었다. 봄이 오기 전에 밭을 좀 더 넓히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런 막노동은 사람을 부르면 좋겠다고 했지만 레돔에게는 먹히지 않는다. ‘와인 만들기의 기본은 농사일이야.’ 그는 빨간 장화 총각에게 곡괭이를 쥐여준다. 이럴 때 그는 굉장히 냉정해 보인다.
“수천만 년이 지나 지구의 퇴적층을 연구할 때 한국 땅을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을 거야. 무지하게 많은 비닐이 나오면 거기가 한국이야.” 레돔이 이런 말을 하면 나는 내 부모를 모욕하는 느낌이 들어 불같이 화가 난다. 농촌 쓰레기에 대해서 내가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변명을 늘어놓게 된다. “농부들이 비닐을 사용하는 데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 있겠지. 비닐을 덮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다잖아!” 나의 변명은 먹히지 않는다. 그렇다면 청소는 깨끗이 하고 원래 상태로 돌려줘야 하는 것 아닌가? 땅속에 묻힌 비닐은 갈가리 찢어져 가루가 되면 썩지도 않고 돌아다니는데? 농사 다 지었다고 손 탁탁 털면 끝이야? 이 땅은 그들의 자식이 살아갈 땅인데? 레돔은 사정없이 포화를 날린다. 타이어 위에 앉아 긴 격론을 벌이지만 해결 방안은 찾지 못하고 한숨만 푹푹 쉬게 된다.
“비닐을 삼킨 돌고래가 생각나요. 고래뿐만 아니라 땅도 경련을 일으키며 호흡곤란으로 괴로워하는 것 같아요. 이 많은 비닐을 땅속에 품고 있었다니!” 빨간 장화 총각이 이렇게 한마디 한다. 양조 기술을 배우러 왔다가 이제 환경문제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자, 시드르나 한 잔씩 하자고.” 나는 중참으로 가지고 온 시드르 뚜껑을 따고 한 잔씩 따라준다. 술을 따르다 보니 엄마와 함께 잡초를 뽑았던 그 옛날이 생각난다. 쪼그려 앉아 호미로 일일이 잡초를 뽑던 시절이 있었다. 제초제 같은 건 없었다. 뽑아낸 잡초의 흙을 털어내고 한쪽에 수북하게 쌓아두고 가져온 막걸리를 마시는 순간이 참 좋았다. 엄마는 항상 잔이 넘치도록 막걸리를 따라 땅이 먼저 마시게 했다. “땅님, 시원한 막걸리 많이 드시고 올해도 우리 농사 잘되게 해주이소! 많이 드시소!” 이렇게 땅에게 소원을 빌었다.
나도 엄마 흉내를 내보았다. 시드르를 한 잔 듬뿍 따라 땅에게 뿌렸다. “땅님, 한번 맛보세요. 당신 준 것으로 만든 것이에요.” 비닐이 뽑혀나간 땅은 시원하게 시드르를 들이켠다. 나는 땅에 바짝 고개를 숙이고 속삭인다. “땅님 미안합니다. 그래도 잘 봐주세요. 앞으로 잘할게요.”
신이현 작가
※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와 충북 충주에서 사과와 포도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