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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판 검란[횡설수설/김영식]

입력 | 2020-02-19 03:00:00


미국 워터게이트 스캔들 당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악화되는 여론을 특별검사 임명으로 무마하려고 했다. 그의 지시에 따라 1973년 5월 엘리엇 리처드슨 당시 법무장관은 아치볼드 콕스를 특검에 임명했다. 하지만 콕스가 대통령 집무실에서 녹음된 테이프를 증거물로 제출하라고 요구하자 닉슨은 리처드슨 장관에게 콕스를 해임하라고 명령했다. 리처드슨 장관은 이를 거부하고 사임했다. 닉슨은 법무부를 계속 압박해 콕스를 해임했지만 결국 탄핵 위기에 몰렸다가 자진 사임했다.

▷미국 전직 검사 및 법무부 관료들이 16일 성명을 내고 윌리엄 바 법무장관의 사퇴를 촉구했다. 법무부가 러시아의 미 대선 개입 스캔들로 기소된 로저 스톤의 형량을 낮춰 달라고 담당 판사에게 요청한 사실이 드러나자 법조계가 분노한 것이다. 검찰은 앞서 10일 스톤에게 7∼9년을 구형했으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비선 참모로 대선 승리의 일등공신이었던 스톤의 감형을 압박했다. 법무장관이 대통령의 무리한 요구에 호응한 데 대해 실망한 담당 검사 4명이 사표를 던지면서 미국판 검란(檢亂)으로 번지고 있다.

▷바 장관은 13일 ABC방송 인터뷰에서 “대통령의 트윗 때문에 도무지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대통령에게 트윗을 멈추라고 한 과감한 발언을 두고 바 장관마저 대통령의 개입에 불만을 나타냈다는 분석도 있었다. 하지만 이 발언은 법무부가 담당 판사에게 형량을 낮춰 달라는 서한을 보낸 뒤에 나온 것으로 드러났다. 내부 반발을 무마하고 대통령의 개입 논란을 차단하려는 면피용 발언을 한 것이라는 지적이 제기되는 이유다.

▷미 행정부의 장관들이 ‘세크러터리(Secretary)’로 불리는 것과 달리 법무장관 직함은 ‘어토니 제너럴(Attorney General)’이다. 한국의 검찰총장을 영어로 번역한 것과 같고 역할에도 유사점이 많다. 과거엔 관할 부서도 없는, 대통령에게 법률 문제를 조언하는 장관 1인 직책 자리였으나 지금은 연방수사국(FBI)과 마약단속국(DEA), 연방검찰 등 11만여 명을 이끄는 조직의 수장이다.

▷바 장관의 사퇴를 촉구하는 서명자는 계속 늘어나 18일 현재 2000명을 넘어섰다. 민주당은 물론이고 공화당 정부 시절 법무부 재직자가 상당수 포함됐다. 대통령의 정치적 동지라는 이유로 형사 기소에서 특별대우를 받아선 안 되며, 법무장관이 대통령의 ‘개인 변호사’처럼 처신한 것은 법치를 훼손한 행동이라는 비판이 뜨거운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권력자가 자신과 관련된 수사를 부당하게 방해할 때 벌어지는 일이어서 남의 일 같지 않다.
 
김영식 논설위원 spea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