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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 칼럼]대통령이 잘못 굴린 눈 뭉치, 눈사태 된다

입력 | 2020-02-21 03:00:00

최고 권력자가 던진 한마디… 일선에선 至上命令돼 온갖 무리수
“마음에 큰 빚”이란 文의 曺國 애정… ‘문빠’들의 금태섭 공격 불 지펴




이기홍 논설실장

69년 전 2월 경남 거창에서 국군이 양민 719명을 학살했다. 군은 공비토벌 작전이었다고 주장했지만 희생자 중 14세 이하 어린이가 359명, 61세 이상 노인이 74명이었다.

이런 참극을 불러온 시발점은 국군 11사단장 최덕신이 하달한 ‘견벽청야(堅壁淸野)’ 작전 명령이었다. 견벽청야는 삼국지 손자병법 등에 나오는 전술로, 성을 견고히 지키면서 성밖 곡식을 모두 거둬들여 들판을 비우는 전법이다.

공비 토벌에 그럴싸한 전법 같지만 지리산 자락에 숱한 마을이 형성돼 있는 현지 여건에선 실현 불가능한 발상이었다. 하지만 일단 사단장이 내린 지시는 연대, 대대를 거치면서 절대 실행 해야만 하는 과제가 됐고, 압박감에 쫓긴 일선 지휘관은 주민을 집단 사살해 매장하는 극단적 방법으로 들판을 비우는 ‘청야’를 실행했다.

권력자가 조막만 하게 뭉쳐 굴린 눈이 아래에서는 산사태를 낼 수 있다. 1991년 경찰이 쇠파이프로 시위 대학생을 구타해 숨지게 한 것도 한 예다. 노태우 대통령은 ‘물태우’란 소리가 싫었는지 “법집행을 소홀히 하면 엄중문책하고, 법집행 과정에서 소신껏 일하다가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서는 정상참작을 할 것”이라고 했는데 그 한마디가 일선 시위진압 현장에서는 쇠파이프로 커진 것이다.

공권력이 법질서가 흐트러질 만큼 너무 무르지도, 인명피해를 낼만큼 너무 과하지도 않게 대처하면 얼마나 좋으련만, 세상 일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 공권력의 무게중심은 윗선의 한마디에 한쪽으로 쏠리기 일쑤다. 권위주의 정권일수록 일선에서의 ‘오버’ 위험이 커진다.

여당이 최근 다시 ‘조국 논쟁’에 휘말리게 된 것은 “마음에 큰 빚이 있다”며 끝내 조국에 대한 애정을 표출한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과 무관치 않다. 대통령이 의도했든 아니든 ‘문빠’들은 조국과 공수처에 부정적이었던 금태섭을 겨냥해 일어섰다. 권력자가 던진 한마디가 광신도 지지자들의 봉기를 부추긴 대표적 사례가 수천만 명의 인명을 앗아간 중국 문화혁명의 홍위병이다.

최근 민주당은 김의겸 정봉주 문석균(문희상 국회의장 아들) 문제 등에서 운동권 출신 전략가들의 조직답게 좌파승리라는 목표 달성을 위해 자기 꼬리를 과감히 잘라냈다. 그런데 문빠들의 극성 앞에선 흔들리고 있다. 대통령이 굴려 보낸 눈 뭉치가 쇳덩이처럼 무겁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요즘 연신 기업 행사를 찾아가지만 투자는 살아나지 않고 기업 해외 탈출은 계속된다. 문 대통령은 기업 투자와 성장을 강조하면서도 반드시 “포용성장 정책이 성공하고 있다”고 덧붙인다.

공무원들은 대통령이 취임 초부터 굴려 보낸 소득주도성장·친노동·재벌개혁이라는 눈 뭉치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메시지로 받아들이며 기업인을 혼내주고 노동계의 점수를 따는 일에 골몰하고, 기업인들은 계속 움츠러드는 것이다.

사실 대기업을 적폐로 간주하며 손볼 날만 꼽는 좌파 진영의 행태는 참으로 모순 되고 아이로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현 집권세력의 명운은 자신들이 손가락질하는 대기업들의 성공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온갖 경제 실정(失政)에도 한국 경제가 근근이 버티는 것은 휴일 아침잠도 못 잘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는 경쟁 속에서 신사업을 기획하고, 새 시장을 뚫으며 이윤을 창출해내는 기업 임직원들의 덕이 크다.

만약 삼성 현대 등이 좌파의 구박에 이젠 지쳤다며 해외시장 경쟁에서 퍼질러 주저앉으면 그러지 않아도 소득주도성장과 세금 퍼주기 정책으로 활력을 잃은 한국 경제는 바로 고꾸라지고 말 것이다.

돈 한 푼 벌어오지 않는 남편이 아내를 구박하고 내쫓으려 하지만 정작 그 가정이 지탱되는 것은 아내가 근근이 삯바느질이라도 해서 온 식구를 건사하는 덕분이라는 그런 줄거리의 옛 드라마들이 생각난다.

권력자들은 눈 뭉치를 굴려 보내면서도 자신은 발을 뺄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는다. 1951년 거창양민학살 사건 재판에서 연대장, 대대장은 무기징역과 10년형을 선고받았지만 사단장 최덕신은 직위해제에 그쳤다. 최덕신은 그 후 외무장관 서독대사 등으로 승승장구하다 돌연 월북해 김일성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지내다 1989년 자연사했다.

‘민주당만 빼고’ 칼럼 필자에 대한 공격의 불씨를 댕긴 민주당은 고발을 철회하고 지지자들이 나선 것이나, 대통령 앞에서 “(경기가) 거지같다”고 한 시장 상인이 문빠들에게 시달리자 청와대가 “문 대통령이 그분이 공격받는 것이 안타깝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전하면서도 “지지층에 대한 반응은 아니다”라고 선을 그은 것도 적당히 발을 빼는 모양새다.

권력자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이루려고 밀어붙이면, 필연적으로 어딘가에서 탈이 난다. 권력자의 한마디가 일선에선 지상명령이 되고, 한 상(床) 차려 올려 기회를 잡아보려는 이들까지 극성을 부리게 마련이다.

일선에서 과도하게 오버하는 이들이 나오지 않으려면 위를 향해 잘못된 방향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휴대전화 압수 등 압박과 감시, 거침없는 보복성 인사로 관료사회는 청와대가 내려 보낸 눈 뭉치를 무조건 받아 굴리는 조직이 돼 버렸다. 이런 분위기에선 청와대가 굴린 눈 뭉치가 눈사태가 되어 민생을 덮치고, 종국에는 정권까지 덮칠 수 있다.

이기홍 논설실장 sechep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