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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도 크로스오버도 ‘어쩌다’로 시작 ‘운명’이 됐네요”

입력 | 2020-02-21 03:00:00

뮤지컬 ‘적벽’ 도전 소리꾼 안이호
동료와 호흡 맞춰가는 뮤지컬, 힘들지만 색다른 맛 있어 좋아
중학교때 우연히 국악 접하고 매료… 국악고-서울대 국악과 행로 밟아
다양한 장르 무대 뛰어든 계기도… 결혼식 축가 부르며 춤추다 발탁
되는대로 소리내다 보면 목표에… 그게 바로 안이호의 소리




뮤지컬 ‘적벽’에서 여자 소리꾼 박인혜와 함께 ‘조조’를 연기하는 안이호. 무대소품인 부챗살 사이로 비친 그는 “젠더 프리 (성구분않는) 캐스팅이 새로운 시도 같지만 판소리는 애초 모든 배역에 성별 구분이 없다. 조조라는 인물에 집중해 여러 갈래로 캐릭터를 분석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몇 년 전 해외에 나갈 때였다. 출입국심사 서류의 직업란에 무얼 적을지 고민하던 그는 영어로 ‘Soriggun(소리꾼)’이라고 적었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소리꾼이 뭐냐’고 묻는 외국심사관 앞에서 그는 “라이크 어 싱어, 액터, 믹스!(Like a singer, actor, mix!)”라고 콩글리시를 구사했다. 국내 심사관에게는 “판소리 하는 사람”이라고 덧붙였다. 사람들이 그를 신기하게 바라볼 때는 남모를 자부심을 느꼈다. 그때 깨달았다. ‘내가 어디서 뭘 하든 난 천생 소리꾼이다.’

밴드 ‘이날치’의 보컬, 힙(hip)한 소리꾼, 개그 내레이터, 소리꾼 래퍼, 실험적 아티스트 등 숱한 수식어가 따르는 소리꾼 안이호(40)가 뮤지컬에 도전한다. 최근 서울 중구 정동극장에서 만난 안이호는 “모든 일은 한 번만 해봐도 면역이 생기는데 공연만큼은 그런 게 없어 좋다”며 “어떤 무대, 장르에 도전하든 저는 판소리 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동극장의 대표 래퍼토리인 뮤지컬 ‘적벽’에서 ‘조조’를 연기한다. 작품은 판소리 ‘적벽가’ 속 ‘적벽대전’ 대목을 다뤘다. 흥겨운 판소리 합창과 부채를 주요 오브제로 활용한 역동적인 안무가 특징이다. 판소리로 먼저 ‘적벽가’를 익힌 덕에 극의 줄거리나 캐릭터는 친숙한 편이다. 특히 “무게감이 있으면서도 희화화된 조조 캐릭터”를 구현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각종 공연을 섭렵하며 쌓은 무대 내공도 도움이 된다. 하지만 뮤지컬 장르는 소리꾼인 그에게 만만치 않다.

“판소리에서는 비교적 자유롭게 소리 내고 연기할 수 있어요. 반면 뮤지컬에서는 연출 및 동료 배우와 약속된 호흡을 맞춰 가는 게 힘들면서도 색다른 맛이 있어요. 무대 위에서 제 끼를 좀 줄이고 ‘연습 때와 공연이 너무 다르다’는 말을 덜 듣는 게 목표입니다.”

서울국악예술고와 서울대 국악과를 졸업하며 이른바 국악 엘리트 코스를 밟은 그가 정통 판소리에서 살짝 비켜나 여러 장르에 뛰어든 건 ‘어쩌다’였다.

“한 결혼식에서 축가를 부르다가 간주 부분에서 즉흥적으로 춤도 추면서 끼를 뿜어냈죠. 그걸 식장에서 본 안은미 안무가와 연출이 ‘구상 중인 작품에 괜찮겠다’며 캐스팅했어요. 그때부터 다양한 실험적 무대에 서는 ‘판소리 여정’이 시작됐죠.”

안이호가 중학생 시절 판소리에 입문한 계기 역시 ‘어쩌다’였다. 국악을 들어본 적도 없던 그는 친구의 고모이자 지금은 스승이 된 김영자 명창의 집에 우연히 놀러 갔다. 이후 친구들 사이에서 그가 판소리를 배운다는 소문이 돌았고 얼마 뒤 초대받아 보러 간 김 명창의 공연에서 운명적인 끌림을 느꼈다. ‘이 이상한 기분은 뭘까’ 하는 의문이 들면서 머릿속이 하얘졌다. 진짜 소리를 배우고 싶어졌다. 그는 “지물포를 하셨던 부모님의 고객이자 친구의 고모인 김 선생님 댁에 놀러 갔다가 소리를 시작했다니,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며 웃었다.

그가 스스로 생각하는 강점도 판소리를 시작한 계기와 닮았다.

“일단 되든지 안 되든지 소리를 내고 봅니다. 위험하고 무식한 방법일 수 있지만 계산하기보다는 닥치는 대로, 되는 대로 소리를 내다 보면 어느새 목표에 도달해 있죠. 그게 안이호의 소리라고 생각해요.”

4월 5일까지 서울 중구 정동극장. 4만, 6만 원. 8세 관람가
 
김기윤 기자 pe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