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삼의 세계사/설혜심 지음/464쪽·2만5000원·휴머니스트
각종 약재로 둘러싸인 유럽의 약국에서 새롭게 들여온 약초를 선별하는 약제상의 모습. 1750년경 록 박사가 제작한 판화다. 당시 동인도회사에 소속된 의사들은 현지 무역에서 귀중한 인삼을 대거 사들였다. 도판 출처 Wikimedia Commons 휴머니스트 제공
일찌감치 고려인삼의 효능을 알아본 동아시아 지역에는 개성상인들이 부지런히 이 상품을 사방으로 유통했다. 이들이 구축한 네트워크 안에서 인삼은 오랜 기간 동양 왕실 최고 진상품이자 희귀품의 지위를 누려 왔다. 흙 속의 진주 같은 이 약재만 비밀스럽게 찾아나서는 심마니들도 자연스레 생겨났다.
값지고 비밀스러운 인삼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덧 서양에도 흘러들어 갔다. 서양과 교류가 시작된 17세기에 인삼은 유럽과 처음 만났다. 효능을 체험한 유럽인들은 “인삼은 만병통치약”이라는 입소문을 냈고 교역 속도에는 불이 붙었다. 심지어 영국 소도시의 지역신문에도 “씨는 3월에 심고 모판에 옮겨 흙 위로 12인치 정도 자랄 때까지 키운다. 그 뒤로 옮겨 심어 4피트가 될 때까지 그늘막을 친다”는 한국 인삼밭의 정경을 묘사한 기사가 실릴 정도였다. 책은 이 지점에서 본격 시작한다.
‘인삼 종주국’을 자처하는 한국에서 인삼 연구가 약리, 효능 같은 이공계 분야에만 치중해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이 비대칭성을 극복하려는 저자의 사명감도 저술에 한몫했다. 책은 한마디로 인삼의 인문사회학적 가치를 돌아보는 여정인 셈이다.
1부에서는 본초학(本草學)을 중심으로 인삼에 대한 동서양의 지적 교류를 담았다. 1617년 런던 동인도회사 본부에 도착한 고려인삼은 처음으로 서양 지식체계에 편입됐다. 예수회를 통해 인삼 관련 지식을 접한 영국 왕립학회나 프랑스의 왕립과학원은 인삼 연구를 시작했다. 2부에서는 인삼이 아메리카대륙, 유럽을 넘나들며 세계적으로 유통된 궤적을 살핀다. 후에 한반도를 둘러싸고 경쟁하는 열강의 눈에도 가장 중요한 자원은 인삼이었다.
인삼의 역사와 궤적을 따라가는 데서 한 발 더 나간다. 오늘날 서양에서는 인삼을 값비싼 상품으로 거래하면서도 효능이 과학적이지 않다거나 인삼을 좇는 심마니들이 미개하다는 이중적 잣대를 지니고 있다. 저자는 이를 ‘인삼을 타자화’한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으로 규정하고 인삼이 ‘동양의 전유물’이 된 배경을 3, 4부에서 짚는다. 18세기 후반 서양 의학계는 인삼의 유효 성분 추출에 계속 실패하는데, 동양이 가진 우수한 추출 기술에 열등감을 갖고 인삼의 약성을 폄하하기 시작한 게 타자화의 시초가 됐다는 것이다.
치밀한 문헌 연구가 돋보이는 학술서이면서도 누구나 쉽게 읽어 내려갈 수 있다. 저자가 직접 찾은 고문헌과 화려한 시각 자료가 책장을 술술 넘기게 만든다. 오늘날 흔히 접하는 인삼이 한때 전 세계가 열광했던 ‘세계 상품(global commodity)’이었음을 깨닫고 나면 아침에 마신 홍삼즙에서 더 깊은 맛을 느낄지도 모른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