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 밖에서 나는 죽고 그대는 살아서/정창권 지음/304쪽·1만7000원·돌베개
서울에 있는 32세의 추사 김정희(1786∼1856)가 1818년 4월 대구에 있는 가족에게 쓴 한글 편지다. 답장을 못 보냈다고 ‘죄가 많다’며 자책하는 걸 보면 수신자는 아버지나 어머니였을까. 웬걸, 받는 사람은 아내 예안 이 씨다. 김정희는 아내에게 항상 극존칭으로 편지를 썼다. 추사의 아버지 김노경(1766∼1837)도 마찬가지였다.
추사 집안의 한글 편지 85통을 현대어로 옮기고 해설한 책이다. 이 편지들은 조선에서 남존여비 사상이 극심했고, 집안일은 여성들의 전유물이었다는 통념을 깬다. 추사 집안의 남성들은 안살림과 노비 관리, 제사나 혼인 등 많은 일을 해냈음이 여러 편지에서 드러난다. 남자들은 의복과 음식을 잘 알았고, 옷감이나 반찬거리를 뒷바라지했으며, 직접 살림을 하기도 했다.
남자는 부엌일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금기는 아예 없는 것처럼 보인다. 출가한 딸이 자주 친정에 가는 등 가깝게 지냈던 것도 확인할 수 있다.
고려대 문화창의학부 초빙교수로 역사 속 소외 계층에 대한 책을 주로 써 온 저자는 “조선 후기 남성은 여성과 협력해 각종 집안일을 일상적으로 했다”면서 “권력의 향유자라기보다 집안의 대표자 역할을 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