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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화학 미래시장 선점한 신동빈의 ‘현장 경영’

입력 | 2020-03-02 03:00:00

[더 나은 100년을 준비합니다/다음 100년 키우는 재계 뉴 리더]
<6> 글로벌 영토 넓히는 ‘뉴 롯데’




지난해 5월 본격 가동에 들어간 미국 루이지애나주 레이크찰스 롯데케미칼 공장. 3조6000억 원을 투입한 대형 프로젝트가 완성되면서 롯데는 연간 450만 t의 에틸렌 생산 능력을 갖춘 국내 1위 에틸렌 생산 기업이 됐다. 레이크찰스=강승현 기자 byhuman@donga.com

미국 텍사스주를 출발해 차로 2시간여 만에 도착한 루이지애나주 곳곳에는 수백 개의 파이프 관으로 연결된 화학공장들이 눈에 띄었다. 이곳에선 연간 수천만 t의 에틸렌이 생산된다. 플라스틱 등의 원료로 쓰이는 에틸렌은 ‘석유화학 분야의 쌀’로 불린다. 시트고(CITGO), 필립스66 등 글로벌 석유화학 기업의 공장을 지나 조금 더 가니 낯익은 ‘롯데’의 심벌 마크가 보였다.

지난해 12월 방문한 루이지애나주는 유통과 화학을 두 축으로 미래 새 시장을 선점하겠다는 롯데의 방향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다. 국내에서 대형 유통기업으로 익숙한 롯데는 세계 석유화학 시장과 호텔 시장으로 영역을 넓히기 위해 미국을 전진기지로 삼고 있다.

○ 과감한 결단력으로 새 시장 개척

롯데그룹이 미국에서 화학 사업을 한창 추진 중이던 2015년 말, 국제 유가가 배럴당 30달러 수준까지 떨어지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에틸렌 생산 원료를 원유에서 셰일가스로 대체하려던 석유화학 업계는 고민에 빠졌다. 유가가 하락하는 만큼 에탄크래커(셰일가스 등 천연가스를 통해 생산한 에틸렌)의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유가 시장이 불안해지면서 당시 셰일가스 최대 매장지 가운데 하나인 미국 루이지애나주에 석유화학 공장 설립을 추진하던 글로벌 기업들은 하나둘 사업 철회를 결정했다. 불안에 떨던 국내 대기업들도 대부분 탈출 행렬에 동참했다.

롯데케미칼도 발등에 불이 떨어지긴 마찬가지였다. 당시 미국 현지에서 사업을 추진하던 황진구 롯데케미칼 상무(현 롯데케미칼 미국법인 대표)는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에게 현장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고했다. 불안한 유가 시장에 따른 높은 리스크와 사업의 불확실성을 들며 사내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지만 신 회장은 새로운 먹거리 창출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 롯데케미칼 출신으로 석유화학 부문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던 신 회장은 실무자들과 소통하며 사업 진행 상황을 직접 챙겼다.

루이지애나주 레이크찰스에 3조6000억 원을 투입해 3년 만에 설립한 공장은 지난해 5월 본격 가동을 시작했다. 롯데케미칼은 연간 450만 t의 에틸렌 생산 능력을 갖추며 국내 1위 에틸렌 생산 기업이 됐다. 공장 준공식 참석차 미국을 방문한 신 회장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만났다.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에 신 회장과 만난 사진을 올리며 대미(對美) 투자에 감사를 표시했다. 2019년 롯데케미칼 미국 현지법인의 영업이익률은 25%가량이다.

○ ‘뉴 롯데’ 외치며 글로벌 영토 확장

석유화학 부문과 함께 신 회장은 호텔사업의 글로벌 영토 확장에도 힘을 쏟고 있다.

2010년 러시아에 처음 진출한 롯데호텔은 베트남, 미얀마, 일본 등으로 진출했다. 2015년에는 138년 전통의 뉴욕 팰리스호텔을 인수하며 미국 시장에 뛰어들었다. 인수 금액 9000억 원을 두고 업계에선 고가(高價) 인수, 무리한 투자 등의 논란이 일었지만 신 회장은 선진 시장 공략을 통한 글로벌 경쟁력 확보에 더 높은 가치를 매겼다. 팰리스호텔 인수로 롯데는 단번에 세계 호텔업계에서 인지도도 높였다. 또 롯데가 인수한 후 팰리스호텔의 투숙객은 예전보다 20% 가까이 늘었다.

연말 분위기가 한창이던 12월에 찾은 롯데 뉴욕 팰리스 주변은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최고급 룸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방의 예약이 끝난 상태였다. 베키 허버드 롯데 뉴욕 팰리스 총지배인은 “롯데가 팰리스호텔을 인수한 이후 고객 서비스의 질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많은 고객들로부터 팰리스가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는 피드백을 받고 있다”면서 “리더의 빠른 판단과 책임 위주의 경영이 미국 비즈니스를 성공으로 이끌고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미국 동부 진출에 이어 지난해 12월에는 하나금융투자와 손잡고 시애틀 대형 호텔을 약 2040억 원에 인수했다. 신 회장은 글로벌 체인을 중심으로 브랜드 인지도를 높여 세계적인 호텔 브랜드로 거듭난다는 전략을 펼치고 있다.

롯데그룹이 최근 몇 년간 보여주는 행보는 ‘뉴 롯데’를 만들겠다는 신 회장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재계는 보고 있다. 2016년 신 회장은 “그룹 경영철학과 전략을 기존의 양적 성장 중심에서 질적 성장 중심으로 전환하겠다”며 해외시장 개척을 강조하고 있다. 롯데그룹은 미국과 인도네시아 등에서 공격적인 투자를 하고 있는 화학 부문 외에 유통, 호텔, 식품 등에서도 해외 사업의 속도를 높이고 있다.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서는 새 영역에 대한 도전이 필수라고 본 것이다. 올해 첫 계열사 대표 회의에선 “혁신을 주도하는 게임 체인저가 돼 달라”고 주문했다. 새 방식으로 새 시장을 주도하겠다는 신 회장의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레이크찰스·뉴욕=강승현 기자 byhuma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