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신이현 작가··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
“있잖아, 거기 그 집 지금 무너뜨리고 있더라! 적어도 100년은 더 된 집이잖아. 나무가 너무 아깝다. 한번 가보지 않을래?”
양조장 오는 길에 야트막한 언덕에 있던 옛집을 이윽고 무너뜨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주 작은 집이었다. 지날 때마다 언제 허물어질까, 저 집의 나무 기둥들을 우리가 가질 수는 없을까, 궁리했던 것이다. 우리는 멀리서 집이 허물어지는 것을 보았다. 포클레인이 지붕을 콱 집어서 뜯어 올렸다. 나무와 흙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옆으로 옮겨졌다. 네 개의 벽과 툇마루도 콱 집어서 뜯어버렸다. 거인이 손가락을 벌려 난쟁이 집을 으그러뜨리는 것과 같았다. 굵은 나무들이 반 토막 날 때마다 레돔이 신음 소리를 냈다.
“와, 이것 봐라. 이건 너무 귀한 것이야.” 나도 무더기 틈에서 무언가를 찾아냈다. 싸리나무를 통째로 베서 만든 싸리 빗자루와 요즘엔 찾기 어려운 나무로 만든 사과궤짝, 짚으로 엮은 소쿠리도 있고 손으로 꼰 새끼줄도 나왔다. “정말 옛날 사람들이었나 봐.” 언덕 아래 빛이 잘 드는 곳에 살았을 어떤 분들, 싸리나무를 베어 만든 빗자루로 툇마루를 쓸었겠지. 겨울엔 새끼줄을 꼬고 직접 지게를 만들었을 농부의 손이 떠올랐다. 이제는 사람도 간 곳 없고, 집도 사라지고 앞에 펼쳐진 논도 사라질 것이다. 우리가 가져온 이 나무 기둥들만이 주인이 쓸고 닦았던 그 손길을 기억할 것이다.
“점심은 집에서 먹어야겠지.” 무려 세 번이나 나무를 트럭에 싣고 와서 정리를 하고 나니 힘이 없고 배가 고팠지만 당분간은 점심도 직접 해먹어야 하는 분위기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계속 살아야 한다면 앞으로 얼마나 견디며 살 수 있을까. 집에 있는 먹거리를 1일 분량으로 계산해 보니 한 달은 먹고도 남겠다. 먹지도 않으면서 너무 많은 것들을 쟁여두고 산다는 생각이 든다. 이 기회에 술 창고 정리도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와인 저장고로 갔다.
“이건 대체 뭐지? 정말 기억이 안 난다.” 술을 담그기 시작한 첫해 우리는 열정적이었다. 그 모든 방법들을 다 시험해 보았다. 먼지를 덮어쓰고 잠든 옛날 시험용 와인들을 한 병씩 깨워서 뚜껑을 열어보았다. “아, 배로 만든 시드르다! 정말 맛이 없군. 다 버린 줄 알았더니 아직 남았네. 오, 이건 허니 애플 와인이잖아… 생각보다 맛있다!” 득템한 기분이 들어 허니 애플 와인을 한잔 가득 따라 밖으로 나갔다. 누군가의 노랫말처럼 맛없는 것은 없는 대로, 맛있는 것은 있는 대로 그런 의미가 있는 것이겠지. 와인을 마시며 레돔은 나무를 쓰다듬는다. 이 나무들은 잘 닦아서 내년에 지을 새 양조장 어딘가에 쓸 것이다. 우리는 이 나무들을 오랫동안 잘 사용할 것이다. 싸리나무 빗자루 또한 평생 사용할 것이다. 이 나무를 볼 때마다 야트막한 언덕 아래 집을 짓고 살았던 어떤 농부의 한시절과 뒤숭숭한 전염병의 한때를 떠올릴 것이다. 아, 그땐 참 심각했지! 하고 웃을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신이현 작가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와 충북 충주에서 사과와 포도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