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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성공담 목말랐던 시절, 우상이 된 기업인들

입력 | 2020-03-07 03:00:00

[그때 그 베스트셀러]1989, 1990년 종합베스트셀러 1위 (교보문고 기준)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김우중 지음/308쪽·1만3800원·북스코프




신동해 웅진씽크빅 단행본사업본부 편집주간

1980, 90년대 독서계의 새로운 현상 중 하나를 들라면 거물 경제인의 자전적인 책들이 나와 인기를 끌었다는 점이다. 그전까지 베스트셀러는 주로 문학과 에세이 분야에서 나왔고 저자도 교수나 소설가 시인이었던 데 반해, 경제성장이 본격화하던 1980년대 중반부터 경제인도 저자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삼성 이병철 회장의 ‘호암자전’(1986년)이 효시였다면 1991년 ‘그대의 야심, 첫 번째’는 현대건설 이명박 회장의 이야기를 소설로 다뤘다. 그해 말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의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가 화제작이 됐고, 그 다음 해에는 당시 럭키금성 구자경 회장이 ‘오직 이 길밖에 없다’를 펴내며 릴레이를 이어갔다. 이명박 회장의 ‘신화는 없다’, 빌 게이츠의 ‘미래로 가는 길’과 ‘생각의 속도’, 안철수의 ‘영혼이 있는 승부’ 등도 종합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리면서 ‘경제인 자서전=베스트셀러’라는 공식을 만들어 나갔다.

이 새로운 장르에서 가장 유명한 책을 고르라면 역시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의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김영사·1989년)일 것이다. 대우그룹이 재계 ‘빅4’ 중 하나로서 세계 전역으로 나가기 시작할 무렵 김 회장이 자신감을 가득 담아 쓴 책이다. 이 패기 충천한 책 제목은 당시 유행어가 되다시피 했고 국가적 자신감과 맞아떨어진 콘셉트 덕분에 ‘최단기 100만 부 판매 기네스 기록’에 오르기도 했다(누적 150만 부).

지금 다시 읽어 보면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이 느껴진다. ‘나인 투 파이브’(오전 9시 출근, 오후 5시 퇴근)가 아니라 ‘파이브 투 나인’으로 일했다는 자랑, 자정 너머까지 회의를 하다가 통행금지에 걸려 직원들끼리 여관에서 잠을 잔 일 등은 지금 눈으로는 중증 워커홀릭 스토리에 가깝다. 한 명문대생이 “대우는 일을 너무 많이 시켜서 입사하기 싫고, 외국계 회사에 갔다가 나중에는 카페를 차리고 싶다”고 하자 “(이런 젊은이와) 더불어 무슨 이야기를 하랴”라고 한다.

책을 관통하는 한 문장을 꼽으라면 바로 이 문장이다. “무엇이든 해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만큼 나쁜 일도 드물다.” 물론 지금 봐도 절절한 국가와 사회에 대한 소명감, 젊은이에 대한 애정에서는 진정성이 느껴진다. 언제 누구한테 도움을 받게 될지 모르니 사람을 폭넓게 사귀고 같이 ‘윈윈’하라는 충고도 새겨둘 만하다.

김 회장은 이후 ‘세계경영’을 선언하면서 동유럽으로 진출해 ‘김기즈칸’이라는 별명까지 얻으며 재계 2위로 올라선다. 그러나 외환위기의 파고를 넘지 못하고 1999년 그룹은 해체에 들어간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라던 저자는 지난겨울 영면에 들었다.

책을 덮으며 가만히 생각해 본다. 우리는 성공한 기업인의 책에서 무엇을 보려고 한 걸까.

신동해 웅진씽크빅 단행본사업본부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