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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터리 왕좌의 게임

입력 | 2020-03-09 03:00:00

리튬이온 대체할 차세대 배터리는?




배터리 없는 일상을 상상하기 힘든 세상이 됐다. 손 안의 휴대전화부터 전기자동차까지 모두 배터리가 필수로 들어간다. 배터리 충전 용량과 속도는 이들 전자기기의 성능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힌다.

배터리 시장은 리튬을 사용하는 리튬이온배터리가 ‘천하통일’을 이루고 있다. 무선 이어폰부터 스마트폰, 여름철 들고 다니는 휴대용 선풍기, 무선 청소기, 전기자동차, 심지어 미국 자동차기업 테슬라가 호주에 건설한 ‘세계 최대 배터리’인 에너지저장시설(ESS)까지 모두 리튬이온배터리를 쓴다. 하지만 공학자들은 만족을 모른다. 천하통일을 이룬 리튬이온배터리를 대체할 차세대 배터리를 새로운 재료 연구를 통해 찾고 있다. 나트륨(소듐)과 칼륨(포타슘)은 최근 가장 주목받는 차세대 배터리 소재로 떠올랐다.

미국의 전기자동차 및 에너지 기업 테슬라가 호주 남부 애들레이드 근처에 2017년 건설한 혼스데일 전력저장소는 리튬이온배터리를 이용한 세계 최대 에너지저장시설이다. 호주재생에너지청 제공

배터리는 양(+)극과 음(-)극으로 구성된다. 리튬이온배터리는 양극을 구성하는 재료(양극재)에서 나온 리튬이온이 전지 내부에서 이동해 음극재에 저장되거나 방출되면서 전기를 충전하고 생산한다. 리튬은 원소기호 3번으로 화학시간에 배우는 주기율표에서 수소 바로 아래에 있다. 주기율표에서는 흔히 1족 원소 또는 알칼리금속 원소라고 불린다. 폭발성이 강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전자를 쉽게 내놓아 양이온이 잘 되는 성질이 있어 전기에너지 변환 능력이 좋다.

높은 전압의 배터리를 만들 수 있고 수소 다음으로 작은 양이온이라 이동 속도도 빨라 충전과 방전 속도가 빠르다. 지난해 노벨위원회가 화학상 수상자로 이 전지의 효율을 높일 기술을 개발하고 상용화의 기틀을 닦은 세 명의 공학자를 선정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단점도 있다. 올해 1월 한국을 찾은 배터리 분야 석학 거브랜드 시더 미국 로런스버클리국립연구소(LBNL) 교수는 서울 강남구에서 개최한 최종현학술원 과학혁신콘퍼런스에서 “리튬이온배터리는 양극재에 니켈이나 망간, 코발트를 써야 한다”며 “하지만 이들은 자원 매장량에 한계가 있어 언젠가 대체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과학자들은 새 후보물질을 찾고 있다. 대부분 리튬과 화학적 성질이 비슷한, 주기율표에서 리튬과 같은 1족 원소에 속하는 물질들이 거론된다. 리튬 바로 아래에 위치한 나트륨과 그 아래의 칼륨이다. 주기율표에서 나트륨 바로 옆에 위치한 2족 원소 마그네슘도 후보 재료로 꼽힌다.

리튬이온배터리로 지난해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존 구디너프 미국 텍사스대 교수와 시더 교수는 각각 칼륨이온배터리를 연구하고 있다. 칼륨은 싸고 풍부하며 이론적으로 리튬 못지않은 전기를 생산할 수 있다. 칼륨도 리튬처럼 화학적 반응성이 높아 불이 붙거나 폭발이 일어날 수 있다는 단점이 있고, 칼륨이온이 자유롭게 이동할 양극용 재료를 발굴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그동안 연구가 활발하지 못했다. 하지만 최근 사용 가능한 양극재가 여럿 발굴되면서 소재로서 개발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구디너프 교수 연구팀은 ‘프러시안블루’라는 물질을 전극 소재로 활용하기 위해 연구 중이다. 프러시안블루는 짙은 푸른색 염료로 사이안화철과 사이안화망간을 포함한 화합물이다. 구디너프 교수팀은 이를 이용해 칼륨이온은 물론이고 나트륨이온이 드나들 수 있는 양극 소재를 개발하고 있다. 시더 교수 연구실의 김해겸 LBNL 연구원은 플루오린 및 인산, 바나듐이 들어간 화합물로 칼륨이온배터리용 양극재를 개발하고 있다. 그 외에 칼륨의 폭발성을 제어할 전해액, 불이 붙지 않는 전극도 곳곳에서 개발되고 있다.

나트륨이온배터리는 좀 더 연구가 활발하다. 나트륨은 소금을 구성하는 원소로 지표면에 리튬보다 500배 이상 풍부하고 값이 싸다. 재생에너지용 대용량 배터리에 유리하다. 시더 교수는 “나트륨이온배터리 기술은 사실상 거의 확보됐다”며 “시장만 생기면 3∼4년 내에 사용 가능한 수준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국내에서는 강기석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가 나트륨이온배터리에 쓰일 흑연 음극재를 지난해 6월 개발해 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에 발표했다. 흑연은 현재 리튬이온배터리에도 널리 사용되는 음극재로 얇은 흑연층 사이로 리튬이온이 드나들며 충방전이 일어난다. 가격이 싸고 충방전 속도도 빠르다. 하지만 나트륨은 리튬보다 원자가 커 그동안 흑연 음극재를 쓸 수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강 교수는 용매를 이용해 흑연층 사이에 나트륨이온이 쉽게 드나들도록 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이렇게 만든 음극재는 에너지 저장 밀도가 높으며 2년 반 이상 매일 한 번씩 충전과 방전을 해도 성능이 떨어지지 않았다.

흑연을 사용하지 않는 음극재도 연구되고 있다. 육종민 KAIST 교수팀은 나노 크기의 판 구조를 지니는 황화구리를 이용해 나트륨이온배터리용 음극재를 2018년 개발해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에 발표했다. 지난해에는 이 음극재의 작동 원리를 밝히고, 5년간 하루 1번씩 충방전 해도 성능이 93%까지 유지될 정도로 내구성이 높다는 사실도 증명했다.

윤신영 동아사이언스 기자 ashill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