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영 한화생명 라이프플러스랩
헉헉거리며 길게 늘어선 줄 끝에 멈춰 섰다. 이미 앞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때, 앞에서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 여기 줄 선 거 안 보여요?” 미간을 구긴 채 고개를 내밀어 보니 울먹이는 남자가 있었다. “저, 할머니가 돌아가셔서요.” 짧게나마 정적이 흐르는가 싶더니 앞의 그 아주머니가 말을 이었다. “여기 안 급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무서웠다. 각자의 생존을 위해 비정을 불사하는 사람들. 하지만 가장 무서웠던 것은, 그 순간만은 나 역시도 그 비정함에 동조했다는 것이었다. 그의 처지에 공감하기엔 12월 북유럽의 공항은 너무나도 추웠다. 이때 알았다. 당장 나의 안위 앞에서 사람은 한없이 이기적일 수 있다는 것을.
영화 속 장면들이 하나하나 현실화되어가는 것들 중 가장 무서운 것은 바로, 다름 아닌 사람들의 눈빛이다. 그리고 그 눈빛은 인터넷 기사 속 댓글에서도 드러난다. 확진자들에 대한 혐오. 그들도 한때는 ‘우리처럼’ 마스크와 손세정제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조심스럽게 살아내던 ‘무고한 시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확진자라는 꼬리표가 붙는 순간 그들은 ‘○○번’이라는 죄수번호와 함께 마녀사냥의 대상이 되었다. 확진자들이 바이러스 치료와 함께 우울증 등에 따른 정신 치료를 병행하고 있다는 사실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 바이러스는, 비단 일신의 안녕에 대한 불안뿐 아니라 사람, 사회에 대한 혐오를 함께 가져왔다. 마치 ‘판도라’가 금단의 상자를 열어 인간에게 죽음과 병을 가져온 것처럼.
그리고 혐오는 바이러스처럼 증식시켜 특정 지역, 종교, 집단을 넘어 국가, 인종을 대상으로 번진다. 미국에 거주하는 지인이 한국인 혐오에 대해 하소연하며 덧붙였다. “이게 다 중국 때문이야.” 그 주변의 미국인들은 “이게 다 동양인들 때문이야”라고 하지 않을까? 중국인들은 “이게 다 우한 때문이야”라고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 우한에는 영문도 모른 채 가족을 잃은 가장 아픈 사람들과 이들을 지키는 가장 용감한 이들뿐이다.
바이러스를 생각한다. 가장 가까운 이를 가장 위태롭게 하는, 최후의 순간에조차 외로워야만 하는 그 잔인한 속성을 깨닫는다. 질병과 더불어 낙인까지 떠안은 가엾은 마음들, 변해버린 일상, 아득한 온기를 더듬는다. 바이러스로 인해 빼앗기는 것은 마스크 없이 거리를 활보하는 자유, 그것이면 족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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