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석 전 질병관리본부장
감염병과의 전쟁에서 최전방사령부인 질병관리본부가 권한도 별로 없고, 평소에는 보건복지부 간부 인사 적체 해소용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기막힌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정기석 전 질본 본부장은 4일 “그래서 질본 독립이 중요한데 감염병이 확산할 때만 떠들다가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지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이진구 논설위원
―정은경 본부장의 머리가 하얗게 센 사진이 화제가 됐다.
“힘들 때니까…. 어디 보니까 한 시간은 좀 넘게 잔다고 하던데…. 몸도 몸이지만 아마 마음고생이 무척 클 거다. 전문 인력 등 모든 게 부족한 데다 권한도 별로 없으니까.” (질본 본부장은 최전선 지휘관인데 권한이 없다니.) “코로나19로 질본 본부장이 지휘하는 중앙방역대책본부가 생겼다. 그럼 여기서 방역에 관한 모든 것을 컨트롤해야 한다. 그러라고 만든 거다. 그런데 위기대응 단계 격상에 따라 보건복지부 장관이 본부장인 중앙사고수습본부가 만들어지고, 다시 ‘심각’ 단계가 되니까 국무총리가 본부장인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가 생겼다. 장관, 총리가 방역을 아나? 정 본부장이 결정하고 말해야 할 것을 그 위에서 하니 엇박자가 안 나고 배기겠나. 즉시 조치는 고사하고 아마 위에 보고하고 설명하는 데 시간을 다 보내지 않을까 싶다. 얼마나 답답하겠어.”
―그럼 질본은 지금 주로 뭘 하나.
“역학조사 정도… 신천지 교도가 어디서 얼마나 감염됐고, 감염원이 여기냐 저기냐 하는…. 그런 건 질본 역할 중 일부분일 뿐이다. 본부장에게 제대로 된 권한이 있었다면 중국 우한에서 터졌을 때 중국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을 막았을 거다. 얼마 전 정 본부장이 ‘방역하는 입장에서 고위험군이 덜 들어오는 게 좋은 것은 당연하다’고 했는데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로서는 엄청 세게 얘기한 거다. 그런 말을 할 스타일이 아니거든.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중국에서 들어온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전파했다고 했는데 거짓말이다. 일단 보름 정도만 입국을 막으면 한국인도 중국에 안 가기 때문에 금방 준다. 29번 환자도 한동안 왜 감염됐는지 몰랐는데, 그때 이미 지역사회 감염이 시작됐다고 보고 심각 단계로 올렸어야 했다. 본부장에게 권한이 있었다면 둘 다 즉시 했을 거다. 그리고 파생 문제를 예상하면서 마스크 물량을 점검하게 되고, 수출 금지, 최대 생산을 건의했을 거다. 대만이 그러지 않았나. 하지만 요원한 얘기다. 지금은 인사권도 없으니.”
“내가 취임했을때 6급 이하 인사를 1년 정도 지나서야 할 수 있었다. 물론 규정은 6급 이하 인사는 소속 기관의 장이 한다고 돼있다. 하지만 실제는 달랐다. 복지부가 안 놔준다. 얘기를 계속하고 주변과 언론에서도 본부장에게 인사권이 없는 게 문제라고 하니까 그때서야 놔줬다. 지금은 또 어떤지 모른다.” (인사권도 없는데 당신은 왜 맡은 건가. 몰랐나?) “잘 모르기도 했고, 나 때 처음으로 1급에서 차관으로 승격돼 차관이면 할 수 있는 게 있을 줄 알았다. 또 메르스로 그렇게 혼이 나서 아무도 안 하려는 자리에 왔으면 재량권을 줄 거라 생각했다. 순진했지….” (5급 이상은 본부장이 전혀 모른다는 건가.) “사전 의논 없이 일방적으로 내리꽂으니까…. 물론 복지부 장차관과 얼마나 가까운지에 따라 살짝 얘기는 해주지만 시스템은 아니다.”
―감염병 대응에는 역학조사관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전문성이 떨어진다고 하던데….
2016년 2월 지카바이러스 대응 회의에 참석한 정기석 당시 질병관리본부장(왼쪽)과 정은경 긴급상황센터장.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역학조사관은 전문임기제로 현재 정원은 43명이지만 33명이 일하고 있다.(2월 27일 기준) 코로나19 사태로 130명까지 늘리기로 했지만 신분은 달라지지 않았다.
“왜 안 했겠나. 의사 출신 역학조사관은 10년 정도 하면 고위공무원단이 될 수 있는 자격과 인센티브를 주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안 됐다.” (왜 안 된다고 하던가.) “정부 조직에서… 그런 걸 공문으로 명확하게 알려주지는 않는다. 구두로 전달하면 돌고 돌아서 안 된다는 말만 온다.”
―역학조사관이 실제 뭘 하는지 잘 모르기 때문도 이유가 아닌가.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는 EIS(Epidemic Intelligence Service)라는 역학조사 전문요원 양성 프로그램이 있다. 연방수사국(FBI)처럼 등에 로고가 박힌 점퍼를 입고 다니는데 ‘질병수사관’으로 불린다. 국립보건원에 이들을 양성하는 대학원을 만들고 싶어 건의했는데 안 됐다. 대학원을 만들면 학생이 오고, 교수 등 전문 인력이 양성된다. 하나의 학문 사회가 생기면 관련 인력 풀이 커진다. 이번에 대구같이 큰 도시에도 제대로 된 역학조사관이 없었다. 역학조사관 분야가 제대로 서있으면…. 그들이 평소에 감염병을 연구하고, 이런저런 상황에 대비한 대응책을 짜고, 가상훈련을 계속한다. 그 시나리오 속에 주변국 입국 금지는 어떻게 할지, 자국민 이송, 마스크 수급, 병상 준비 등이 모두 포함된다. 그러다 터지면 즉시 대응하는 거다.” (지금 많은 전문가들이 미리 선제적으로 했어야 한다고 지적하는데.) “그 사람들 중 평상시에 방역 대책을 고민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나부터도 마찬가지다. 지금 코로나19가 터지니까 논문 찾아보고 얘기해주는 거지…. 언제 코로나 방역 대책을 생각했겠나.”
―지금 질본의 문제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게 뭔가.
※ 질본 브리핑은 정 본부장이 혼자 하다 지난달 말부터 권준욱 국립보건연구원장이 함께하고 있다.
―감사원은 메르스 사태 때 병원명 비공개가 감염을 확산시켰다며 당시 양병국 본부장, 정 본부장(당시 긴급상황센터장) 등 질본 간부들의 중징계를 건의했다. 하지만 정작 결정권자인 당시 문형표 복지부 장관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았다.
“나는 그들이 희생양이었다고 본다. 내가 본부장이 되면서 징계가 집행됐는데 막아보려고 했지만 잘 안됐다. 권한도 없던 사람들에게 책임을 지우면 되나. 그때 실망한 의사 출신 간부들이 많이 떠났다. 지금도 이런저런 문제가 지적되는데… 솔직히 지금 경질하면 정부가 잘못했다는 걸 자인하는 꼴이니 못 하겠지만 사태가 끝나고 나면 알 수 없다. 안 그래도 권한은 없고 책임만 많아서 아무도 안 하려는 자리인데…. 임기도 그렇다. 코로나19 사태가 터지기 전인 작년 12월에 청와대에서 정 본부장 후임을 물색했다. 여기저기 전화해 하겠냐고 묻고 다녔거든. 정 본부장이 2년 반쯤 됐으니 바꿀 때가 됐다고 생각한 것 같다. 하겠다는 사람이 없었던지 그러다가 지금 사태를 맞았는데…. 질본이 정치색이 있는 곳도 아니고 전문가들은 좀 오래 놔두면 안 되나.”
―더불어민주당이 총선 공약으로 질본의 청 승격, 6개 지역본부 설치, 복지부내 보건 담당 2차관 신설 등을 발표했는데, 2015년 메르스 사태 때 박근혜 정부가 발표한 것과 똑같다.
“상황이 끝나고 나면 아무도 관심이 없으니까 추진하지도 않고, 다시 터지니까 그대로 갖다 쓴 거지. 문재인 대통령 대선 공약 중 하나가 질본 독립이다. 공약 지켜지는 거 별로 없지만 역시나였다. 이번에도 저러다 말 거다. 그냥 하는 소리들이다.”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