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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연극인들의 ‘마지막 고투’ 동아가 함께했다

입력 | 2020-03-10 03:00:00

오영식 근대서지학회장, 1939년 ‘동아연극대회’ 팸플릿 공개




함세덕의 희곡을 원작으로 2002년 영화화된 ‘동승’(위쪽 사진). 원작 희곡은 1939년 동아일보 주최 제2회 연극경연대회에서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한 ‘도념’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됐다. 당대의 대표적 신극운동단체인 극예술연구회의 후신 극연좌가 공연했다. 아래 사진은 제2회 연극경연대회 심사 후기 등을 다룬 동아일보 1939년 3월 9일 지면. 동아일보DB

81년 전 광란의 일제강점기 말 ‘연극인들의 마지막 고투’로 평가되는 동아일보 주최 ‘제2회 연극경연대회’ 팸플릿(사진)이 발견됐다.

서지학자이자 근대 문헌 수집가인 오영식 근대서지학회장은 “1939년 3월 개최된 이 대회 팸플릿을 최근 입수했다”며 9일 본보에 공개했다. 팸플릿은 표지를 포함해 6쪽으로 출품작 4편의 공연 일정(각 5회)과 줄거리, 제작진 명단 등이 실려 있다. 양승국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이날 본보와의 통화에서 “이 대회 팸플릿은 지금까지는 공개된 게 없었다”고 의의를 말했다.

팸플릿이 발견되면서 한국 연극사에서 이 대회가 갖는 의미가 새삼 주목된다.

일제가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일으킨 직후인 당시는 전시총동원체제가 구축되면서 문화예술계를 더욱 압박하던 때였다. 전쟁을 선전하는 연극 ‘시국극(時局劇)’을 직접 제작한 조선총독부는 조선 지식인들이 도입한 서구적 근대극인 신극 운동을 봉쇄하기 시작했다. 대표적 신극 단체인 ‘극예술연구회’는 활동을 중지해야 했다. 반면 일제가 허용한 ‘흥행극’은 성황을 이뤘다.

이런 상황에서 동아일보는 1938년 2월 신극계가 결집한 가운데 ‘종합예술의 정화인 연극의 대중화’를 목표로 제1회 연극경연대회를 주최했다. 공연장인 부민관(현 서울 중구 서울시의회 건물)은 연일 초만원을 이뤘다. 양 교수는 “신극이 힘들어지고 연극계가 일제의 ‘국민연극’으로 전환되던 시기에 전체 신극인이 참여해 신극을 부흥시키려는 움직임이었다”고 의의를 평가했다.

특히 이듬해 열린 제2회 대회는 ‘우리의 연극예술을 창조하자’는 목표로 “이 땅 사람의 정서를 그린” 창작극만 참가하도록 했다. 1회와 달리 “번안, 각색은 불허”한 것. 근대 희곡의 명작으로 꼽히는 함세덕(1915∼1950)의 ‘동승’이 처음 소개된 것도 2회 대회다. 극예술연구회 후신 ‘극연좌’의 대회 참가작인 ‘도념’이 바로 ‘동승’이다.

이 대회는 일제의 한국어 말살 정책을 정면으로 거스른 것으로 평가된다. 2회 대회를 앞두고 본보가 개최한 좌담회 ‘조선연극의 나아갈 방향’에서 참석자들은 일부 번역극의 대사가 “조선말답지 않다”며 되풀이해 부자연스러움을 지적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2013년 나온 논문 ‘동아일보사 주최 연극경연대회와 신극의 향방’(이민영, ‘한국극예술연구’ 42집)은 “대회 심사 후기 역시 조선어다운 자연스러움과 어조, 단어 선택 등을 지속적으로 강조했고, 이는 한국어 말살에 나선 일제의 정책과 전면 배치된다”며 “연극경연대회의 취지가 식민지 조선에 불어 닥치던 전쟁 분위기와 일제의 내선일체(內鮮一體) 정책에 역행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밝혔다. 또 “이 대회는 전시체제로 접어들던 1930년대 말 조선 신극계가 벌인 마지막 고투의 현장”이라고 덧붙였다.

2회 대회 심사 결과 ‘청어’를 상연한 ‘통천예우극장’이 단체상을 받았고 극연좌와 ‘중앙 무대’의 배우들이 개인연기상을 받았다. 신설된 희곡상은 ‘낭만좌’가 공연한 박향민 작 ‘상하(上下)의 집’이 받았다. ‘상하의 집’은 가난에 시달리다 연극을 포기할 지경에 이른 연극인들의 현실을 드러내며 식민지의 구조적 문제를 은밀히 드러냈다는 평가다. 1939년 3월 본보가 연재한 심사 후기에서 평론가 임화(1908∼1953)는 이 작품 등을 두고 “절망적인 각본이 나온 건 이 시대 인텔리의 운명인 것을 작자가 느꼈기 때문이라고도 생각된다”고 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