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4월 11일
플래시백
만화(漫畵). 사전에선 ‘이야기 따위를 간결하고 익살스럽게 그린 그림’, ‘사물·현상의 특징을 과장해 인생이나 사회를 풍자, 비판하는 그림’이라고 풀이합니다. 많은 나라들처럼 한국에서도 초창기 만화는 신문이 주도했습니다. 신문 만화는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데다 특히 일제강점기 때는 은유적 표현으로 당국의 검열을 어느 정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현대 한국만화의 비조(鼻祖)로는 한말 대한협회가 발간한 대한민보에 한 칸 만평 ‘삽화’를 연재한 화가 이도영을 꼽습니다. 1909년 6월 2일자 창간호에 ‘대·한·민·보’ 4행시를 읊는 개화기 신사를 시작으로 주로 시대상황을 풍자하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1920년 4월 1일자 창간호 3면에 실린 김동성 기자의 만평. 갓 태어난 동아일보가 단군의 터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1920년 4월 19일자 4칸 만화. 동서양 남녀관의 차이를 흥미롭게 그려냈다.
1920년 5월 31일자. 소년과 노인, 노총각과 부부의 대조적인 바람을 표현했다.
‘서울은행장의 죽음’이라는 부제를 붙인 1920년 7월 26일자 4칸 만화. 배금주의를 경계하자는 메시지를 해학적으로 풀어냈다.
이 ‘이야기그림’은 물론 창간호 ‘단군유지’도 동아일보 창간기자인 천리구(千里駒) 김동성(1890~1969)의 작품입니다. 김동성은 첫 해외특파원, 첫 한영사전 편찬자, 초대 공보처장 등 수많은 ‘한국 최초’ 타이틀을 가졌을 정도로 다재다능했습니다. 미국에서 신문학(新聞學)을 공부하며 만화에 관심을 가진 그는 ‘이야기그림’ 등 만화 창작에 그치지 않고 후학을 양성하는 데도 힘썼습니다. 1923년 잡지 ‘동명’에 최초의 만화 입문이론인 ‘만화 그리는 법’을 11회 실었고, 동아일보 미술담당 기자 노수현에게 만화를 가르치기도 했는데 이들은 1924년 조선일보로 옮겨 훗날 영화로도 제작된 ‘멍텅구리 헛물켜기’를 연재하기도 했습니다.
1924년 11월 5일자 1면에 실린 ‘동아만화’. 나막신을 신은 일본 여자가 비수를 숨긴 채 닭에게 모이를 주는 장면을 그려 일본인의 이중성을 고발했다.
1925년 5월 7일자 ‘동아만화’. 악마로 표현된 일제에 머리를 물어뜯기면서도 펜을 잡으려는 조선청년 언론인의 치열함이 느껴진다.
원문
◇ 이야기 그림이라 동아일보
① 길 가는 사람이 업드러져도 동아일보
② 밥 먹을 틈이 업시 동아일보
③ 귀한 아기가 무릅에서 떠러져도 동아일보
④ 반시 동안 머리 깍는 시간을 참지 못하여 동아일보
현대문
◇ 이야기 그림이라 동아일보① 길 가는 사람이 발에 걸려 넘어져도 ‘동아일보’
② 밥 먹을 틈도 없이 ‘동아일보’
③ 귀한 아기가 무릎에서 떨어져도 ‘동아일보’
④ 반시간 머리 깎는 동안을 참지 못하고 ‘동아일보’